4일차, 꿈.
공허함과 파멸이 겹쳐진다. 또 그 풍경이다.
누군가 그곳에 누워있는 것 같다. 어떤 거대한 존재가 조용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 ......거기 누구 있어?
》 잡아보자.
??? : .......!!
??? : 너.... 내가 보이는 거야?
??? : 분명 아무도 날 볼 수 없고,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텐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었을까, 이런 적은 처음이야......
??? : 잠시만, 잠들지 마, 죽지 마! 이렇게 가버리면, 나는 또―
풍경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또 오랜 시간이 흐른 듯 주변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 다려― 지마―
「세계 재구성..........」
??? : 알고 있어. 처음부터 그랬지. 이건 네 몫이니까....... 이걸로 끝인가.
??? : .........
??? : 한 가지만 물어볼게.
??? : 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여?
「세계 재구성......... 시작」
4일차 아침, 성스러운 별 교회
또 그 꿈을 꾸었다. 왠지 모르게 깊은 물 속에 가라앉는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비안틴 : 좋은 아침이야, 시에나. 세츠 신관은 아까 외출했어. 아무래도 우리가 교회의 아침식사 시간을 놓친 것 같아......
비안틴 : 내가 만든 샌드위치를 집어들고 날아가듯 뛰어가더라. 아, 네 계란 프라이는 노른자가 두 개니까 먹어 봐.
계란을 입에 넣자마자, 손에 쥔 단말기에 힐다의 메세지가 도착했다.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리리코와 연락이 안 돼. 그 애는 매주 이 시간에 내게 정기 보고를 하고 있어.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리리코가 사는 곳은 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아. 주소를 보낼테니까 무슨 일인지 가서 확인 좀 해봐.
비안틴 : ......시에나? 무슨 일이야?
비안틴이 고개를 기울여 단말기에 도착한 메세지를 확인했다.
비안틴 : 응, 그럼 가보자.
시에나 : 어?
비안틴 : 왜 그런 얼굴로 나를 보는거야? 네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걸. 내가 위험하다고 말해도 너는 분명 가고싶어하겠지.
비안틴 : .......네가 그런 사람이니까.
비안틴 : 출발하자. 세츠 신관에게도 메세지를 남겨둘게.
4일차 아침, 고등학교 구역
리리코 : .........
외진 곳에 있는 호숫가는 으슥하고 고요했다. 리리코는 이젤 앞에 앉아 호숫가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고, 핏기없이 망연자실했다. 온몸을 휘감은 성채는 마치 편지를 토해내듯 몸을 부풀렸다가 수축시키길 반복하고 있었다.
리리코 뒷쪽의 풀밭에는 세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이미 용모를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훼손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무자비하게 사지를 뜯긴 시체들은 인형처럼 바닥에 누워 있다. 새빨간 피가 풀밭을 붉게 적셨다.
리리코는 그들을 등지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성채가 갑자기 팽창하며, 세 구의 시체를 모두 집어삼켰다.
아름다운 색채를 가진 그 유연한 생물은 바닥에 흩어진 인간의 잔해를 휘감았다. 사냥감을 잡은 비단뱀처럼 몸을 꿈틀거리고 있다.
시체들은 순식간에 색채를 잃고 마른 고목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 보도되었던 것과 똑같이 변해버린 모습이다.....
견디지 못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고요함 속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성채의 머리가 이쪽을 돌아봤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시야에 기이한 색채가 빠르게 번져나간다―
비안틴 : ......시에나!!
비안틴이 뒷쪽 오솔길을 박차고 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성채는 놀란 듯 잠시 뒤로 물러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 번 위협적으로 덮쳐왔다.
비안틴 : 이게 바로 성채구나....... 그 사진에 찍혀있던것도 역시........
비안틴 : 지금 저 애의 자의식은 혼란에 잠겨있을거야...... 일단은 깨우는 것부터 해야 해. 지원을 부탁할게, 시에나!
비안틴 : 젠장, 너무 강해....... 너, 설마 그 녀석을 만난거야?
리리코 : ........!
큰 자극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환상을 닮은 색채가 높은 허공으로 솟아올라 마치 커튼을 치듯 사방을 포위했다.
색채로 환상을 표현하듯 눈동자에 비치는 모든 것이 오색찬란한 빛으로 밝게 빛났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별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다시 아찔한 느낌이 엄습해왔다.......
비안틴 : 역시 그 녀석을 만난거지. 이건 그 사람의 힘이야. 그는 너를 철저하게 괴물로 만들 속셈이야!
리리코 : 나.... 나는..... 아니에요.......
비안틴 : 성체의 힘을 제어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잖아. 성채가 네 한 마디 한 마디에 반응해서 폭주하고 있어. 며칠 전 보도된 기괴한 살인 사건은 역시 네가 저지른 일이었구나........
리리코 : 아니에요, 제가 지나갔을 때...... 그 사람들은 이미....... 성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은, 진범의 손에....... 진범에게, 살해당한거에요!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을 진짜 '괴물'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짜 괴물은―
》 비안틴이 더 수상하다.
》 눈앞에 있는 성채이다.
환상의 색채가 모두 사라졌다. 리리코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그저 머리로만 그 장면을 기억하고 되새길 뿐이었다. 눈앞에 남아있는 것은 호숫가에 놓인 이젤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안틴 : ......콜록........
비안틴이 쓰러졌다.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넘쳤고, 복부의 커다란 상처에서 시작해 귀까지 새빨간 액채가 베어나오기 시작했다.
말할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희미한 신음뿐이었다.
세츠 : 시에나― 비안틴― 너희 여기 있어?! 있으면 대답해!
시에나 : 세츠..... 세츠 신관! 우리 여기 있어!
세츠 : 드디어 찾았다. 비안틴에게 메세지를 받자마자 돌아와서 그나마 다행이지,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일단 부축하는 것부터 도와줄게.
세츠 : ......이상한데. 왜 이렇게 가볍지?
세츠는 잠시 망설이다가 비안틴을 부드러운 풀밭에 눕혔다.
비안틴의 웃옷을 벗기자, 목덜미부터 그 아래로 검붉은 색의 기이한 문양이 창백한 피부를 뒤덮고 있었다. 마치 뒤틀린 뱀이 그의 상반신을 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늬는 심장 근처에서 반쯤 감긴 눈 모양으로 굳어져 있었고, 그 주위를 정사각형의 조각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세츠 : 역시, 이건 병의 문제가 아니었군......
세츠 : 시에나, 너도 눈치채고 있었겠지만 비안틴은 계속 몸 상태가 좋지 않았어. 이건 '그의 것이 아닌' 몸과 신기가 그를 계속 밀어내려 하고 있는거야.
세츠 : 비안틴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단서를 찾고 있었어.
세츠 : 성스러운 별 교회에서 흑관에 대해 조사할 때, 비안틴이 나에게 서고의 기록을 열람하게 해달라고 부탁해왔지만 이스카리오가 그걸 거절했고.
세츠 : 방금까지 너희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비안틴은 위독한 상태야. 가능한 한 빨리 비안틴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야 해.
세츠 : 가자!
4일차 아침, 꿈?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홀로 이곳을 배회한걸까?
이젠 기억이 나지 않아.
세계는 순환을 거듭한다. 제각기 다른 사람들, 제각기 다른 일들이 모여 약간의 변수를 만들어낼지라도 종국에는 파멸을 맞는다.
자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없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거리에서 큰 소리로 외친다 하더라도 나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나'는 무엇이며, '나'는 무엇 때문에 태어난 것인가. '나'는 어째서......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무의미한 문제를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기나긴 시간이 있었지만, 끝없는 시간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그 사람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호기심을 품고 그 사람이 남기는 발걸음을 지켜보았고, 그 사람과 함께 반복되는 윤회를 거듭해왔다.
지겹게 느껴졌던 시간과 반복되는 세계 속에서도 그 사람의 존재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 : 너...... 내가 보이는 거야?
그래야만 했다. 영영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더 큰 욕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환희는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또 다시 더 커다란 절망을 낳았다.
??? : 그 순간이 오면...... 너도 나에게...... 미소를 지어줄까?
4일차 아침, 성스러운 별 교회
비안틴 : 시에나, 시에나...... 여기서 자면 안 돼. 감기 걸려......
》 아...... 나 언제 잠든거지?
》 너 일어났구나!
비안틴 :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네게 걱정을 끼쳐버렸네.
비안틴이 팔을 살짝 흔들었다. 다행히 그의 팔에 나타났던 핏빛 문양은 사라졌지만, 풀어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가슴의 끔찍한 문양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비안틴 : ......으음, 사실 발작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괜찮아. 움직이는 것에 그다지 지장이 있지도 않고.
비안틴 : 그렇지만 아까처럼...... 발작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게 느껴져. 비안틴의 몸도 이미 너무 약해졌어.
비안틴 : 몸에 떠오른 문양과 흑관이 접경도시 곳곳에 그려둔 의식의 문장의 모양이 비슷해서, 문장을 지우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역시...... 그 문장을 완전히 해결해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 같네.
》 그건 그냥 평범한 낙서 아니었어?
비안틴 : 나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야.......
》 계속 이 상태가 계속되면 너는 어떻게 되는거야?
비안틴 : 마지막까지, 이 몸은 나를 철저히 거부할테고...... 결국 난..... 사라지겠지.
비안틴 : 걱정하지 마. 나도 계속 해결책을 찾아보고 있는걸.
비안틴 : 흑관이 성스러운 별 교회에서 분열된 조직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이 있어. 어쩌면 내가 원하는 답은 서고에 있을지도 몰라......
》 그치만 거절당했잖아.
》 들어갈 방법이 있어?
비안틴 : 세츠 신관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러 교회를 자주 비우는 편이야. 그 틈에 내가 서고의 창문을 통해 몰래 잠입해서..... 자료를 확인하면 돼. 만약 내가 찾는 자료가 없다면 바로 돌아올거야.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비안틴 : 아, 리리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줘야지. 세츠 신관이 접경도시의 중앙청에 사건의 보고를 올렸고, 지금은 중앙청이 개입했어.
비안틴 : 이 사건은 중앙청이 제대로 해결해줄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그 사건에 깊이 발을 들이지 말았으면 해. 그렇게 해줄래?
비안틴 : 아마 리리코도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그 애의 신기는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어. 경솔하게 접근하는 건 너무 위험해.
비안틴 : ......나에게는 네가 제일 중요해. 네가 사고에 휘말리는 걸 바라지 않아.
손을 잡혔다. 맞닿은 살결에서 묘한 차가움이 느껴지는 한편, 달콤한 현기증이 일었다.
》 대답한다.
》 대답한다?
》 아니, 대답할 수 없다.
마음 속에 기묘한 경계심을 갖고 입을 열었으나, 나도 모르게 승낙해버렸다.
비안틴 : .......다행이다. 고마워.
비안틴 : 기뻐. 이번에는 네가 나를 선택해줬구나.
비안틴은 아주 잠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문득 내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귓가에 들려온 그의 무거운 숨결이 마치 오랜 여행에 지쳐버린 여행자처럼 느껴졌다.
비안틴 : 시에나. 내가 전에 했던 이야기들을 꼭 기억해줘.
비안틴 : 네가 진지하게 들어줘서, 나는 정말 기뻤어.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
비안틴 : 나는 아직도...... 네게 말하고 싶은 게 많아.
비안틴 :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들어줘.
리리코는 성채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비안틴을 크게 다치게 했다. 이 사건은 중앙청이 개입하여 처리하기로 했으니, 나는 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비안틴의 몸도 '거부 반응' 으로 인하여 점점 쇠약해지고 있다. 이제 몰래 교회 서고에 들어가 그를 구할 방법을 찾아내도록 하자.
4일차 밤, 성스러운 별 교회
멍하니 방으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려 해도 집중은 되지 않았지만, 정신 상태만큼은 매우 평온하고 느긋했다.
때마침 손에 들고 있던 단말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 위에는 힐다의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힐다 : 여보세요? 당신 리리코에 대해 알아낸 게 있어? 내가 걔한테 마련해줬던 셋방이 갑자기 일어난 화재로 전부 타버렸어. 학교에도 안 갔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현장에서 시신이 발견된 것도 아냐.
힐다 : 그래서 내가 접경도시로 다시 돌아왔는데, 불쾌한 흔적을 발견했어....... 그래.
힐다 : 아침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당신은 현장에 있었겠지. 나한테 알려줘.
아침에 있었던 일을 힐다에게 전부 말해주었다.
힐다 : .......본래 리리코의 신기 제어 능력은 점점 더 안정되어가고 있었어. 아마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은 모양인데.
힐다 : 걔들의 대화에서 언급된 그 녀석은 현재로선 흑관의 간부 페리안일 가능성이 높아. 리리코는 아마도 그가 데려갔을거야.
힐다 : 이 일에서 손 떼. 그들은 내가 추적할테니, 당신은 계속 비안틴을 주시하고 있어.
》 나도 도울 수 있어.
》 너 혼자서는 너무 위험해.
힐다 :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지금 당신 혼자 리리코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보단 당신이 죽는 게 더 빠르겠지.
힐다 : 중앙청이 이 일에 개입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파졌어. 그 녀석을 붙잡기는 커녕 리리코가 무사히 살아있을 확률도 낮아졌다고.
힐다 : 만약 당신이 그를 뒤쫓다 붙잡히기라도 하면, 그 녀석은 당신을 미끼삼아 비안틴을 끌어들이겠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마.
힐다 :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해. 시에나.
통신이 끊어졌다.
무의식적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지만, 그곳에서는 더 이상 리리코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온통 암흑뿐이었다.
불안감을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의식이 반쯤 잠 속으로 빠져들었을 즈음, 누군가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바위가 떨어진 골짜기처럼 커다란 울림이 퍼져나간다........
소리는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힐다의 전화를 받은 후, 리리코가 흑관에 납치당한 것 같다는 사실을 알았다.
힐다는 내가 더 이 이상으로 이번 사건에 관여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엔딩, 〈괴물의 심장〉 진입.
3일차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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