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25

 

1일차 아침 - 항구

 

 

이변이 생겨 격리된 항구 구역.

힐다는 등을 돌린 채, 구역을 뒤덮은 색채 앞에 침묵하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힐다 : 당신 정말 이 안에서 리리코를 찾아낼 셈이야? 이 뒷쪽이 비정상적인 변이가 일어났다는 건 그냥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 그래도 리리코를 살려야 해.

 

 

힐다 : ......어리석을 정도로 용감하군.

 

힐다 : 받아.

 

 

힐다가 무언가를 던졌다. 한 자루의 단검이었다.

새카만 검신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고, 날 부분에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차가움이 느껴진다. 자루 둘레에는 기이한 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끝부분에 박힌 핏빛 보석[각주:1]이 빛을 발했다.

 

 

힐다 : 몸에 지니고 있어. 어느 정도라면 저기서 받게 될 영향을 상쇄해줄 수 있을 테니까.

 

 

힐다는 담배 연기를 짙게 뱉으며, 실눈을 뜨고 뒷편의 항구 구역을 바라보았다.

 

 

힐다 : 당신이 말한 게 맞다면, 리리코는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나기 이전에 이미 페리안이 말하던 '그 분'과 마주쳤어.

 

힐다 : 나는 처음에 그 자식을 추적해서 여기로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신호가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오판이군. 흑관의 선발대를 버리고 내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혼자 다른 방향으로 내뺀 모양이야.

 

힐다 : 하, 개미 눈물 만큼도 안 변했어.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뭘 희생시키든 상관 없다는 그 태도는.

 

힐다 : 리리코의 정신은 아마 그때부터 그 자식의 의도대로 놀아났을 거야. 그렇게 지금 그 상태가 되었겠지.

 

 

》 놀아났다고?

 

 

힐다 : 멀쩡한 정신상태로 생각이란 걸 했다면 페리안이 미친 놈이란 걸 깨달았을 테니, 그 자식에게 접근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해.

 

 

힐다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었다.

 

 

힐다 :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은 없길 바라겠지만, 만약 당신이 저 안에서 페리안을 맞닥트린다면......

 

힐다 : 내 말 명심해. 절대 그와 말을 섞지 마.

 

힐다 : 그냥 최면의 일종이라고, 무의식의 그림자같은 거라고 생각해. 일단 한 번 말을 섞으면 그 자식이 원하는 대로 통제당하고 영향을 받게 될 테니까.

 

힐다 : 그 사람은 위험해.

 

시에나 : 알겠어..... 하지만 리리코는 예전에 페리안이 자길 지켜줬다고 했는데......

 

힐다 : 그래. 그건 사실이야.

 

힐다 : 하지만, 설마 아직도 그 행동이 순수한 선의같아?

 

 

힐다는 자조적인 웃음을 띄우며 태우던 담배를 떨어트리고 신발 밑창으로 밟아 불을 껐다.

 

 

힐다 : 이게 당신이 말했던 그 초상화야?

 

 

그 그림을 들고 나왔던 건 역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모호해졌지만, 초상화 위에 일그러진 색채 속에는 여전히 오솔길이 드러나 있었다. 

 

 

시에나 : 이 그림 속의 길과 뒷편의 저 길은 모양이 거의 같아. 리리코가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힐다 : .........

 

힐다 : 그래. 당신이 분명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흑문이 그려진 그림이 남아 있었다고  했지. 그 그림은 어디에 있어?

 

시에나 : 그 그림은 당연히―― 응?

 

 

칠흑의 문은 마치 화폭을 쥐어짜내는 것 같았다..... 새카만 색 덩어리가 바깥을 향해 꿈틀거린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힐다 : ......기억 안 나? 그럼 내가 직접 가서 보지. 당신은 이 단검을 가지고 가서 리리코를 찾아.

 

 

》 힐다도 같이 갈래?

 

 

힐다 :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힐다는 뒷편의 오솔길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힐다 : 당신 뒷쪽은 내 눈에 그저 뒤틀린 공간으로 보일 뿐이야. 발을 들일 수 있을 법한 어떤 틈도 없어.

 

힐다 : 오직 당신의 눈에만 그 길이 보이는 거야, 시에나.

 

 

 

그림 속으로 들어왔다.

 

정신과 걸음이 점점 무거워졌고, 종래에는 호흡조차 어려워졌다.

식물 같기도 하고, 곤충 같기도 한 정체모를 것들을 힐다의 단검으로 잘라내며 그림 안의 거친 길을 나아갔다. 그것들은 서로 들러붙어와서, 조금만 부주의하게 굴어도 베일 것 같았다.

 

쉬지 않고 큰 목소리로 리리코의 이름을 부르자 목소리만은 점점 또렷해졌다.

 

캔버스 위의 내용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이미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을 걷고 있는지 시간마저 모호해졌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리리코 : .....시에나...? 시에나에요?

 

 

그 순간, 다채롭고 기이한 색채 속에서 소녀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 리리코! 나 여기 있어!

 

방해가 되는 색채를 힘껏 잘라내자 그제서야 풀숲 속에 웅크리고 있던 리리코를 찾아낼 수 있었다.

 

 

#346. 무색의 빛 : 찬란한 색채 속에서, 소녀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백.

 

망막에 비치는 강렬한 대비의 세계 속, 리리코는 유일한 창백함이었다.

그녀의 머리와 눈동자에 흐르던 색채는 이미 빛이 바래 흐려졌으며, 말라버린 나방의 날개처럼 보였다. 분명 이곳에 존재하나 이 아름다운 세계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다.

 

 

리리코 : 시에나...... 오셨군요.......

 

 

소녀가 품에 안겨왔다. 격렬한 떨림과 흐느낌이 뒤섞인 포옹이었다.

 

 

리리코 : 다행이에요. 흑..... 너무 무서워서.......

 

리리코 : 성채는, 이젠 완전히 통제를 잃어버렸어요.

 

리리코 : 페리안은 마지막 그림까지 전부 완성시켜야 한다고 했어요. 그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계속 그리라고.....

 

리리코 : 성채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는데. 감히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리리코 : 저도 제가 마지막에 뭘 그려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성채가 저를 데리고 도망쳤어요. 페리안은 그가 이미 알아챘다고 말했어요..

 

 

리리코가 손을 꽉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리리코의 두 눈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했으나, 이전보다 훨씬 더 생기가 넘쳤다.

 

 

리리코 : .....시에나, 당신은 가능한 한 빨리 여길 떠나야 해요!

 

 

리리코에게 이끌려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야위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버틸 수 없는 상태였다.

 

 

시에나 : 너 쉬어야 해, 리리코.

 

리리코 : 아, 안 돼요...... 시에나, 계속 이 안에 있으면 분명 들켜버릴 거에요.

 

리리코 : 저 기억이 났어요. 이제 전부 기억해요...... 이건 전부 저 때문이란 말이에요......!

 

리리코 : 그날 밤, 저는 스케치를 끝내고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바로 거기, 비안틴이 지내던 집 근처에서 만났던 거에요. 전 봤어요. 저는 그것을.......

 

리리코 : 아아, 전――

 

 

리리코가 바닥에 쓰러졌다. 덜덜 떨며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고 있다.

 

 

리리코 : 하지만..... 그건 정말로 아름다워서.....

 

 

 

리리코를 데리고 어느 민가에 몸을 숨겼다. 이곳은 교외의 일부분이었는데, 그림 속에서도 비교적 상태가 안정적이었다.

 

리리코는 한참동안 무릎을 감싸안고 앉아있었고, 점차 이성을 되찾았다.

 

 

리리코 : 시에나, 좀 더 가까이 와 주실 수 있어요?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가까이 다가가 붙어 앉자, 리리코가 흐릿하지만 만족스레 미소지었다.

 

 

리리코 : 저와 성채는..... 둘 다 고향을 아주 그리워하고 있어요.

 

리리코 : 보세요. 바깥으로 보이는 시골 마을은 제가 망가트린 고향이고, 별이 빛나는 곳은 성채의 고향이에요.

 

리리코 : 저는 그림 그리는 걸 아주 좋아해요. 페리안의 말이 맞아요. 만약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리리코 : 물론 이 세상에는 그림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도 많겠죠...... 하지만 전 아니에요. 사실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만약 제 그림에 대한 갈망이 지금보다 덜했더라면 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에요.

 

리리코 : 아무도 제가 무엇을 그렸는지 이해하지 못해요. 심지어 조금 더 오래 보면 일반인들은 위험해질지도 모르죠.

 

리리코 : 시에나, 이해할 수 없는 피조물도, 불행을 가져오는 피조물라 할지라도..... 이 세계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리리코 :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데,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리리코는 집 바깥의 풍경을 응시했다. 방연한 색채가 폭풍처럼 모든 것을 휘감고 있다.

 

 

리리코 : 지금까지 저는 마음 편히 그림을 그리려면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그림은 감정을 전달하는 것조차 하지 못해요.

 

리리코 : 심지어 지금은 저 자신조차 제 작품을 통제할 수 없어요.

 

리리코 : 이 일그러진 풍경은..... 제 마음의 구현화에요. 성채와 제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죠.......

 

 

리리코가 손을 뻗어 내 손등을 덮었다. 소녀의 손은 아주 부드러워서, 재앙을 불러왔다고는 조금도 믿을 수 없었다.

 

 

리리코 : 이 며칠간 저와 함께 해 주셔서 고마워요. 당신의 초상화를 그렸던 순간이, 제가 유일하게 안심할 수 있던 시간이었어요.

 

 

》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리리코 : ..........

 

리리코 :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게 뭐 어때서요?

 

리리코 : 힐다 언니가 제게 말했던 적이 있어요. 그녀가 일을 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이라고.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약하기 때문이라고.......

 

리리코 : 이 세계에는 분명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리리코 : 이 길을 선택하고 시도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에요.

 

시에나 :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리리코 : .....네!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리리코 : 그날 밤에, 제가 대체 무엇을 보았는지는 말할 수 없어요. 그건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니까.....

 

리리코 : 그저 아름다웠어요. 예전에 성채가 제게 보여 주었던 별하늘보다도―― 더――

 

리리코 : 저는 그걸 보고 깨달았어요. 그건 인류의 인식을, 종족과 언어를, 지식, 마음을 초월하는 그림이라는 것을요.

 

리리코 : 그걸 완성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거에요.

 

리리코 : 아주 상냥한, 눈물이 날 것 같은...... 고향의 꿈......

 

리리코 : 전, 저는....... 아마 그 그림에 홀려버렸나 봐요. 오로지 그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에요.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리리코 : 그건 틀림없이, 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이니까――

 

 

목소리가 끊어졌다. 리리코는 망연하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리코 : 저는 이미 제정신이에요..... 하지만, 정신이 들수록 명확해져요......

 

리리코 : 그 분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제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리리코 : 전 그 그림을 완성하고 싶어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해요.

 

리리코 : 다른 사람이 불행해진다 해도, 타인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제가 추구하는 예술을. 제가 추구하는 그림을. 그저 그려 내기만 하면 닿을 수 있는 그곳을......

 

리리코 : 시에나..... 그렇다면 절 막으실 건가요?

 

 

리리코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맺고는, 벽에 기대어 잠들었다.

 

집 밖의 풍경이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이곳은 연약한 세계. 불안정한 세계. 저항의 세계.

 

리리코의 세계.

 

 

 

마침내 리리코를 찾아냈다. 그녀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미 한 번 보았던 적이 있는, 인류의 인식을 초월한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그것은 고향의 꿈. 그림을 그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 

 

 

 

 

 

1일차 밤 - ???

 

 

리리코 본인이라 할지라도, 성채와 공유하고 있는 이 세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

다행히 리리코의 정신이 회복되어감에 따라, 이 세계도 점차 평온해지고 있다. 몸을 뒤트는 색채들은 인류를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건물에 붙어 있을 뿐이다.

 

리리코는 내일이 오면 아마 평탄한 길을 이용하여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리리코....?

 

 

리리코 : 시에나, 잠은 잘 주무셨어요? 하지만 아직 밤이에요. 내일이 밝으려면 조금 더 주무셔야 해요.

 

 

리리코가 작은 집의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땅 위에 남아있는 물 웅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웅덩이 위로 짙은 하늘의 그림자가 거꾸로 비치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며 뒤틀리는 별하늘의 광경이다.

 

 

리리코 : 성채.... 괜찮아. 괜찮아요. 우린 분명 떠날 수 있을 거야.....

 

리리코 : 성채는 페리안도 여기에 있다고 했지만, 성채가 이미 그를 가두었으니 적어도 내일까지는 괜찮을 거에요.

 

리리코 : 아, 그리고...... 당신에게 고맙다고 했어요.

 

 

리리코가 수면 가까이에서 작게 소근거리자, 리리코의 목소리를 따라 색채가 변화했다.

 

 

리리코 : 시에나의 고향은 어디에요? 시에나도 접경도시 바깥에서 왔나요?

 

 

》 기억이 안 나.

 

 

리리코 : 미, 미안해요..... 하지만, 전 시에나가 반드시 떠올려낼 거라고 믿어요!

 

리리코 : 분명 시에나의 고향에서도, 누군가 시에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고향.......

 

다시 한 번 나지막한 재잘거림이 낮게 울렸다. 어지러운 풍경이 뇌리에서 부딪친다. 환상과 안개 사이. 그것은――

 

 

시에나 : 검은..... 문.......

 

리리코 : 시에나? 시에나! 괜찮은 거에요?

 

리리코 : 낯빛이 안 좋아 보이는데.......

 

 

리리코가 내 손을 쥐었다. 그 손은 마치 그날 밤처럼 잘게 떨리고 있었으나, 힘을 주어 꽉 잡는다.

 

 

리리코 : 제가 시에나의 옆에서 지켜 줄게요! 그러니까.... 안심하고 주무세요. 

 

리리코 : 당신이.... 날 이렇게 지켜주었던 것처럼.

 

 

 

색채가 왜곡된 구역을 가득 메웠다. 어떤 단어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형용할 수 없으며, 인지는 한순간에 부서졌다 재조립된다.
어느새 정신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버텨야만 한다.

 

 

 

 

 

 

▷ 1일차 종료.

엔딩 〈환상의 색채 속〉으로 이어집니다.

  1. 비둘기 피를 닮은 보석 = 피존 블러드 = 상등품의 루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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