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아침 - 항구
이변이 생겨 격리된 항구 구역.
힐다는 등을 돌린 채, 구역을 뒤덮은 색채 앞에 침묵하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힐다 : 당신 정말 이 안에서 리리코를 찾아낼 셈이야? 이 뒷쪽이 비정상적인 변이가 일어났다는 건 그냥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 그래도 리리코를 살려야 해.
힐다 : ......어리석을 정도로 용감하군.
힐다 : 받아.
힐다가 무언가를 던졌다. 한 자루의 단검이었다.
새카만 검신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고, 날 부분에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차가움이 느껴진다. 자루 둘레에는 기이한 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끝부분에 박힌 핏빛 보석이 빛을 발했다. 1
힐다 : 몸에 지니고 있어. 어느 정도라면 저기서 받게 될 영향을 상쇄해줄 수 있을 테니까.
힐다는 담배 연기를 짙게 뱉으며, 실눈을 뜨고 뒷편의 항구 구역을 바라보았다.
힐다 : 당신이 말한 게 맞다면, 리리코는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나기 이전에 이미 페리안이 말하던 '그 분'과 마주쳤어.
힐다 : 나는 처음에 그 자식을 추적해서 여기로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신호가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오판이군. 흑관의 선발대를 버리고 내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혼자 다른 방향으로 내뺀 모양이야.
힐다 : 하, 개미 눈물 만큼도 안 변했어.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뭘 희생시키든 상관 없다는 그 태도는.
힐다 : 리리코의 정신은 아마 그때부터 그 자식의 의도대로 놀아났을 거야. 그렇게 지금 그 상태가 되었겠지.
》 놀아났다고?
힐다 : 멀쩡한 정신상태로 생각이란 걸 했다면 페리안이 미친 놈이란 걸 깨달았을 테니, 그 자식에게 접근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해.
힐다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었다.
힐다 :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은 없길 바라겠지만, 만약 당신이 저 안에서 페리안을 맞닥트린다면......
힐다 : 내 말 명심해. 절대 그와 말을 섞지 마.
힐다 : 그냥 최면의 일종이라고, 무의식의 그림자같은 거라고 생각해. 일단 한 번 말을 섞으면 그 자식이 원하는 대로 통제당하고 영향을 받게 될 테니까.
힐다 : 그 사람은 위험해.
시에나 : 알겠어..... 하지만 리리코는 예전에 페리안이 자길 지켜줬다고 했는데......
힐다 : 그래. 그건 사실이야.
힐다 : 하지만, 설마 아직도 그 행동이 순수한 선의같아?
힐다는 자조적인 웃음을 띄우며 태우던 담배를 떨어트리고 신발 밑창으로 밟아 불을 껐다.
힐다 : 이게 당신이 말했던 그 초상화야?
그 그림을 들고 나왔던 건 역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모호해졌지만, 초상화 위에 일그러진 색채 속에는 여전히 오솔길이 드러나 있었다.
시에나 : 이 그림 속의 길과 뒷편의 저 길은 모양이 거의 같아. 리리코가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힐다 : .........
힐다 : 그래. 당신이 분명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흑문이 그려진 그림이 남아 있었다고 했지. 그 그림은 어디에 있어?
시에나 : 그 그림은 당연히―― 응?
칠흑의 문은 마치 화폭을 쥐어짜내는 것 같았다..... 새카만 색 덩어리가 바깥을 향해 꿈틀거린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힐다 : ......기억 안 나? 그럼 내가 직접 가서 보지. 당신은 이 단검을 가지고 가서 리리코를 찾아.
》 힐다도 같이 갈래?
힐다 :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힐다는 뒷편의 오솔길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힐다 : 당신 뒷쪽은 내 눈에 그저 뒤틀린 공간으로 보일 뿐이야. 발을 들일 수 있을 법한 어떤 틈도 없어.
힐다 : 오직 당신의 눈에만 그 길이 보이는 거야, 시에나.
그림 속으로 들어왔다.
정신과 걸음이 점점 무거워졌고, 종래에는 호흡조차 어려워졌다.
식물 같기도 하고, 곤충 같기도 한 정체모를 것들을 힐다의 단검으로 잘라내며 그림 안의 거친 길을 나아갔다. 그것들은 서로 들러붙어와서, 조금만 부주의하게 굴어도 베일 것 같았다.
쉬지 않고 큰 목소리로 리리코의 이름을 부르자 목소리만은 점점 또렷해졌다.
캔버스 위의 내용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이미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을 걷고 있는지 시간마저 모호해졌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리리코 : .....시에나...? 시에나에요?
그 순간, 다채롭고 기이한 색채 속에서 소녀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 리리코! 나 여기 있어!
방해가 되는 색채를 힘껏 잘라내자 그제서야 풀숲 속에 웅크리고 있던 리리코를 찾아낼 수 있었다.
창백.
망막에 비치는 강렬한 대비의 세계 속, 리리코는 유일한 창백함이었다.
그녀의 머리와 눈동자에 흐르던 색채는 이미 빛이 바래 흐려졌으며, 말라버린 나방의 날개처럼 보였다. 분명 이곳에 존재하나 이 아름다운 세계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다.
리리코 : 시에나...... 오셨군요.......
소녀가 품에 안겨왔다. 격렬한 떨림과 흐느낌이 뒤섞인 포옹이었다.
리리코 : 다행이에요. 흑..... 너무 무서워서.......
리리코 : 성채는, 이젠 완전히 통제를 잃어버렸어요.
리리코 : 페리안은 마지막 그림까지 전부 완성시켜야 한다고 했어요. 그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계속 그리라고.....
리리코 : 성채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는데. 감히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리리코 : 저도 제가 마지막에 뭘 그려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성채가 저를 데리고 도망쳤어요. 페리안은 그가 이미 알아챘다고 말했어요..
리리코가 손을 꽉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리리코의 두 눈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했으나, 이전보다 훨씬 더 생기가 넘쳤다.
리리코 : .....시에나, 당신은 가능한 한 빨리 여길 떠나야 해요!
리리코에게 이끌려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야위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버틸 수 없는 상태였다.
시에나 : 너 쉬어야 해, 리리코.
리리코 : 아, 안 돼요...... 시에나, 계속 이 안에 있으면 분명 들켜버릴 거에요.
리리코 : 저 기억이 났어요. 이제 전부 기억해요...... 이건 전부 저 때문이란 말이에요......!
리리코 : 그날 밤, 저는 스케치를 끝내고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바로 거기, 비안틴이 지내던 집 근처에서 만났던 거에요. 전 봤어요. 저는 그것을.......
리리코 : 아아, 전――
리리코가 바닥에 쓰러졌다. 덜덜 떨며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고 있다.
리리코 : 하지만..... 그건 정말로 아름다워서.....
리리코를 데리고 어느 민가에 몸을 숨겼다. 이곳은 교외의 일부분이었는데, 그림 속에서도 비교적 상태가 안정적이었다.
리리코는 한참동안 무릎을 감싸안고 앉아있었고, 점차 이성을 되찾았다.
리리코 : 시에나, 좀 더 가까이 와 주실 수 있어요?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가까이 다가가 붙어 앉자, 리리코가 흐릿하지만 만족스레 미소지었다.
리리코 : 저와 성채는..... 둘 다 고향을 아주 그리워하고 있어요.
리리코 : 보세요. 바깥으로 보이는 시골 마을은 제가 망가트린 고향이고, 별이 빛나는 곳은 성채의 고향이에요.
리리코 : 저는 그림 그리는 걸 아주 좋아해요. 페리안의 말이 맞아요. 만약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리리코 : 물론 이 세상에는 그림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도 많겠죠...... 하지만 전 아니에요. 사실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만약 제 그림에 대한 갈망이 지금보다 덜했더라면 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에요.
리리코 : 아무도 제가 무엇을 그렸는지 이해하지 못해요. 심지어 조금 더 오래 보면 일반인들은 위험해질지도 모르죠.
리리코 : 시에나, 이해할 수 없는 피조물도, 불행을 가져오는 피조물라 할지라도..... 이 세계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리리코 :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데,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리리코는 집 바깥의 풍경을 응시했다. 방연한 색채가 폭풍처럼 모든 것을 휘감고 있다.
리리코 : 지금까지 저는 마음 편히 그림을 그리려면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그림은 감정을 전달하는 것조차 하지 못해요.
리리코 : 심지어 지금은 저 자신조차 제 작품을 통제할 수 없어요.
리리코 : 이 일그러진 풍경은..... 제 마음의 구현화에요. 성채와 제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죠.......
리리코가 손을 뻗어 내 손등을 덮었다. 소녀의 손은 아주 부드러워서, 재앙을 불러왔다고는 조금도 믿을 수 없었다.
리리코 : 이 며칠간 저와 함께 해 주셔서 고마워요. 당신의 초상화를 그렸던 순간이, 제가 유일하게 안심할 수 있던 시간이었어요.
》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리리코 : ..........
리리코 :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게 뭐 어때서요?
리리코 : 힐다 언니가 제게 말했던 적이 있어요. 그녀가 일을 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이라고.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약하기 때문이라고.......
리리코 : 이 세계에는 분명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리리코 : 이 길을 선택하고 시도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에요.
시에나 :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리리코 : .....네!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리리코 : 그날 밤에, 제가 대체 무엇을 보았는지는 말할 수 없어요. 그건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니까.....
리리코 : 그저 아름다웠어요. 예전에 성채가 제게 보여 주었던 별하늘보다도―― 더――
리리코 : 저는 그걸 보고 깨달았어요. 그건 인류의 인식을, 종족과 언어를, 지식, 마음을 초월하는 그림이라는 것을요.
리리코 : 그걸 완성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거에요.
리리코 : 아주 상냥한, 눈물이 날 것 같은...... 고향의 꿈......
리리코 : 전, 저는....... 아마 그 그림에 홀려버렸나 봐요. 오로지 그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에요.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리리코 : 그건 틀림없이, 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이니까――
목소리가 끊어졌다. 리리코는 망연하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리코 : 저는 이미 제정신이에요..... 하지만, 정신이 들수록 명확해져요......
리리코 : 그 분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제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리리코 : 전 그 그림을 완성하고 싶어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해요.
리리코 : 다른 사람이 불행해진다 해도, 타인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제가 추구하는 예술을. 제가 추구하는 그림을. 그저 그려 내기만 하면 닿을 수 있는 그곳을......
리리코 : 시에나..... 그렇다면 절 막으실 건가요?
리리코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맺고는, 벽에 기대어 잠들었다.
집 밖의 풍경이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이곳은 연약한 세계. 불안정한 세계. 저항의 세계.
리리코의 세계.
마침내 리리코를 찾아냈다. 그녀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미 한 번 보았던 적이 있는, 인류의 인식을 초월한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그것은 고향의 꿈. 그림을 그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
1일차 밤 - ???
리리코 본인이라 할지라도, 성채와 공유하고 있는 이 세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
다행히 리리코의 정신이 회복되어감에 따라, 이 세계도 점차 평온해지고 있다. 몸을 뒤트는 색채들은 인류를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건물에 붙어 있을 뿐이다.
리리코는 내일이 오면 아마 평탄한 길을 이용하여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리리코....?
리리코 : 시에나, 잠은 잘 주무셨어요? 하지만 아직 밤이에요. 내일이 밝으려면 조금 더 주무셔야 해요.
리리코가 작은 집의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땅 위에 남아있는 물 웅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웅덩이 위로 짙은 하늘의 그림자가 거꾸로 비치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며 뒤틀리는 별하늘의 광경이다.
리리코 : 성채.... 괜찮아. 괜찮아요. 우린 분명 떠날 수 있을 거야.....
리리코 : 성채는 페리안도 여기에 있다고 했지만, 성채가 이미 그를 가두었으니 적어도 내일까지는 괜찮을 거에요.
리리코 : 아, 그리고...... 당신에게 고맙다고 했어요.
리리코가 수면 가까이에서 작게 소근거리자, 리리코의 목소리를 따라 색채가 변화했다.
리리코 : 시에나의 고향은 어디에요? 시에나도 접경도시 바깥에서 왔나요?
》 기억이 안 나.
리리코 : 미, 미안해요..... 하지만, 전 시에나가 반드시 떠올려낼 거라고 믿어요!
리리코 : 분명 시에나의 고향에서도, 누군가 시에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고향.......
다시 한 번 나지막한 재잘거림이 낮게 울렸다. 어지러운 풍경이 뇌리에서 부딪친다. 환상과 안개 사이. 그것은――
시에나 : 검은..... 문.......
리리코 : 시에나? 시에나! 괜찮은 거에요?
리리코 : 낯빛이 안 좋아 보이는데.......
리리코가 내 손을 쥐었다. 그 손은 마치 그날 밤처럼 잘게 떨리고 있었으나, 힘을 주어 꽉 잡는다.
리리코 : 제가 시에나의 옆에서 지켜 줄게요! 그러니까.... 안심하고 주무세요.
리리코 : 당신이.... 날 이렇게 지켜주었던 것처럼.
색채가 왜곡된 구역을 가득 메웠다. 어떤 단어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형용할 수 없으며, 인지는 한순간에 부서졌다 재조립된다.
어느새 정신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버텨야만 한다.
▷ 1일차 종료.
엔딩 〈환상의 색채 속〉으로 이어집니다.
- 비둘기 피를 닮은 보석 = 피존 블러드 = 상등품의 루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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