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차 아침, 고등학교 구역
리리코 : 일―어나요―― 시에나――
리리코 : 헤헤, 한참 주무시더라구요. 먼저 여기 우유 드세요. 이거 마시고 같이 아침을 먹어요!
》 고마워, 리리코.
》 오늘은 기분이 좀 나아 보이네.
리리코 : 시에나가 여기서 저랑 이 어려운 상황을 헤쳐가고 있는데, 제가 마냥 우울한 얼굴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걸요.
리리코 : 저...... 저, 그 사람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거든요.
리리코는 손에 단말기를 든 채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제 그림 뒷면에 적혀있던 그 번호다.
리리코 : .......안녕하세요. 네, 저에요. 리리코.
리리코 : 맞아요. 아직 고등학교 주변에 있어요. 힐다 언니는 지금...... 네? 시에나를요?
리리코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는 뚜렷한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 누구야?
리리코 : 제 지인인데, 이름은 페리안이라고 해요.
》 날 아는 사람이야?
리리코 : 아마 몰랐을 텐데.....
단말기를 빌려 귀에 가져다대자, 맞은편에서 특색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리안 : 시에나 맞니? 아, 편하게 페리안이라고 불러. 난 리리코 친구니까.
페리안 : 네가 지금 리리코를 데리고 내 쪽으로 와 줬으면 해. 지금 그 애는 정신적으로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야. 혼자 이리로 오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되어서 그래.
페리안 : 내게 리리코가 성체를 안정시키게끔 도울 방법이 있어. 하지만 너희가 직접 와야 해.
페리안이 빠르게 주소를 불렀다.
페리안 : 미행당하지 말고 조심해서 와. 나는 흑관 소속이거든.
페리안 :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시에나.
단말기 너머의 남자는 경쾌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전화를 끊었다.
리리코 : 시에나. 저, 저 혼자 가도 괜찮아요.
리리코 : 어제 당신이 여기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받았으니까요!
시에나 : 힐다가 말했잖아. 흑관의 사람들은 너무 위험해. 그런 곳에 너 혼자 가게 할 수는 없어.
리리코 : 음, 그건 저도 알고 있지만....... 힐다 언니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요. 이측회는 인간을 공격하는 괴물들을 절대로 살려 두지 않으니까.
리리코 : 그러니까 저는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한다면 언니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챌 거에요.
리리코 : 안심해요! 흑관에 가입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도움을 받으려는 것 뿐이니까......
》 리리코는 페리안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
리리코가 침묵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리코 : 모르겠어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걸요.......
리리코의 상태가 이상하다. 다른 의견은 전혀 듣지 않은 채, 그저 흑관에 가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리리코와 이대로 헤어진다면 그녀 혼자 그를 만나러 갈 가능성이 너무 높다......
시에나 : 네가 너랑 같이 갈게.
리리코 : 시에나.......
리리코 : 고마워요. 그럼 우리, 어서 아침 먹고 출발하도록 해요!
리리코 : 시에나, 제가 예전에 당신에게 제 고향이 사라졌을 때, 이측회가 세 명을 파견했다고 말했었죠.
리리코 : 그 세 사람의 이름은 힐다, 페리안, 그리고 지경이에요.
리리코 : 제가 처음 페리안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은 힐다 언니와 함께 있었거든요.
리리코 : 그때 힐다 언니는 전투 요원이 아니라 문서 기록자였어요. 말도 거의 안 하고, 후방에서 슈트케이스를 든 채 가만히 서 있었죠.....
리리코 : 이측회 내에서도 저에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지 의견은 서로 엇갈렸어요. 그리고 그때 페리안이 관찰과 제어로도 충분할 거라고 말해줬던 거에요.
리리코 : 그래서, 전 그 사람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 그런데 페리안은 지금 흑관 소속이라고 하지 않았어?
리리코 : 저, 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라요. 힐다 언니 말로는 페리안이 아주 나쁜 짓을 저지르고 이측회를 배신해서, 이측회의 타격이 크다고 했지만......
리리코 : 이측회는 그 사건 이후로 점점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힐다 언니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렸구요.
리리코 : 그 전에는......
리리코의 목소리가 점차 낮아진다. 꿈에 취한 사람처럼 잠꼬대하듯 중얼거리더니, 눈의 초점이 맞지 않게 되었다.
리리코 : 전에 그 할아버지의...... 그 일 이후에....... 저, 페리안을 본 것 같아요.........
리리코 : 그 사람이 저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만약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그 번호로 연락하라고........
지하 통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지하철 터널이 나타났다. 터널의 내부는 습도가 아주 높아서, 아주 조금 걸었는데도 자욱한 물안개가 피부를 덮었다.
아마도 흑문 때문에 공사가 중단된 터널을 흑관이 이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텅 비어있는 로비 한 가운데서 책을 읽고 있던 청년은 고개를 들고, 이쪽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눈동자가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페리안 :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리리코, 이쪽으로 와.
리리코는 멍한 듯 다가가 페리안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성채가 갑자기 불안한 듯 윗쪽으로 솟구쳤다. 하지만 그 직후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페리안의 곁으로 끌려갔다.
페리안 : 아..... 이 색은. 역시 닿으면 안 되는 안 되는 것을 삼켰나 봐.
페리안 : 가엾어라. 운이 나빴던 모양이야. 아마 만나버린거겠지....... 침식이 이미 너무 깊게 진행됐어.
》 리리코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페리안 : 네가 그 시에나겠구나. 네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일단 이쪽에 앉도록 해. 아하하, 겁먹지 마. 나는 네게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청년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지만, 뒤틀린 공기에서는 섬뜩한 기운이 만연히 느껴졌다.
페리안 : 간단하게 설명해 줄게. 비안틴에 대한 것부터 시작할까...... 아. 네가 아는 그것과는 달라. 본래의 비안틴에 대한 이야기야.
페리안 : 너와 함께 교회에 머물렀던 그건 분명 인간이 아니야.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나도 잘 몰라.
페리안 : 이거 참, 물론 지대한 관심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페리안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페리안 : 비안틴은 접경도시에 도착해서 의식을 거행했어. 그 의식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공했어. 하지만 의식 장소에 불러들일 예정이었던 그 분은 어째서인지 자취를 감춰 버렸지.
페리안 :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안틴의 몸을 빼앗은 그건 우리가 부르고자 했던 분이 아니야. 어쨌든 그 의식은 우리가 계획하고 준비했으니 누구를 찾고자 했는지 정도는 확실히 인지할 수 있거든.
페리안 : 비안틴이 머물던 방에는 이미 들렀다 온 참이야. 의식의 흔적이 전부 정성들여 파괴되어 있었지. 정말 화가 났지. 이건 정말 대 실패잖아~ 하면서――
페리안은 리리코의 머리카락을 살짝 어루만지며 달게 미소지었다.
페리안 : 다행히도, 우리의 리리코는....... 의식에 불려온 그 분을 만난 모양이지만.
리리코 : .....제가......만났다고요.....?
페리안 : 그래. 분명 만났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성채가 이렇게 망가질 이유가 없는걸. 아마 그 영향을 받았겠지.
페리안 : 하지만 그건 내게 아주 작은 문제일 뿐이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제 그 분을 찾을 수 있는 열쇠는 리리코뿐이란 거지!
》 잠깐만 기다려......
》 네가 말한 '그 분'은 대체........
페리안 : 응? 일반적인 인식에 따르자면, 보통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 무슨――
페리안 : 나도 일단은 신자야. 신앙이 깊지는 않지만.
페리안 : 어쨌든, 네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든, 그렇지 않든――
페리안은 한 손가락을 세워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페리안 : 내가 성채가 리리코의 통제를 벗어나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이야기야. 그 대신 리리코가 그림을 몇 점 그려 줬으면 해. 간단하지?
페리안 : 이 도시 곳곳의 풍경화로 충분해. 그저 본능을 따라서. 네 그림이 곧 그 분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줄 이정표가 되어 줄 테니까 말이야.
제정신이 아니다.
어디가 어떻게 어긋나 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본능적인 거부감이 앞섰다.
》 만약 우리가 거절한다면?
페리안 : 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싫다면 돌아서서 떠나도 괜찮아. 전혀 문제 없어.
페리안 : 하지만, 지금의 리리코는 이미 성채와 너무 많이 동화되었는걸........
페리안 : 이측회든 성스러운 별 교회든, 그도 아니라면 중앙청이든 더 이상의 살인을 멈추기 위해 그들이 쓸 수 있는 방법은 원흉을 잘라내는 것 뿐이야.
페리안 : 만약 그렇게 된다면 리리코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겠지. 어쩌면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버릴지도 몰라.
리리코 : ..............
리리코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고개를 든다.
페리안 : 충분히 이해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 네가 아까 내가 말했던 곳으로 리리코를 데려가도 난 상관 없어.
페리안 : 하지만――
페리안 : 이 아이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릴 걸.
》 리리코......
리리코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눈 속에는 강렬한 공포가 범람하고 있다.
리리코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페리안의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면..... 리리코는 분명........
페리안 : 본래 리리코의 정신은 이렇게까지 불안정하지 않았어. 유감스럽게도 그 분을 너무 오래 바라본 나머지, 지금은 극도로 연약해져서. 이대로라면 분명 한 순간에 무너지겠지.
페리안 : 조금만 자극해도 완전히 미쳐버릴거야. 정말, 가엾은 인형이구나.
페리안 : 그러니까, 내가 그 분을 찾는 걸 돕는 게 좋아. 분명 그 일은 이 아이가 정신을 되찾는 것 역시 도울 수 있을 테니까.
페리안 : 어때, 그래도 내 부탁을 들어주기는 싫으니?
》 지금은 수락할 수밖에 없어.
》 ................
페리안 : 좋아. 둘 다 착한 아이구나-
페리안 : 그렇다면, 나는 모든 그림이 완성되길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찾아올게.
페리안 : 그렇지, 지금 너희가 리리코의 집에 머무는 건 위험해. 만약 힐다가 일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접경도시로 돌아온다면, 리리코는 분명 처분당할테니까.
페리안 : 그러니 당분간 돌아가지 말아. 내가 지내고 있는 이곳이 비록 조금 누추하긴 하다만, 당분간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거야.
페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전혀 의논하고자 하는 기색이 없다.
그저 우리를 좀 더 편하게 감시하고 싶을 뿐일 테니까........
페리안 : 중요한 일이니 늦어져선 안 돼. 빨리 출발하도록 해. 행운을 빌게~
페리안 : 둘 다 정말 사랑스럽지. 접경도시엔 정말 재밌는 게 많네. 좀 더 일찍 여기로 여행을 올 걸 그랬어.
페리안은 책을 덮고, 사방의 고요한 어둠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페리안 : 그럼, 이제 우리가 잡은 강아지가 도대체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할까―― 그 친구도 부디 날 충분히 즐겁게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이사 가자!
성스러운 별 교회에서 흑관의 거점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집 기능의 조작은 구 시가지에서 가능합니다.
페리안은 리리코에게 그가 모시는 '신'의 흔적을 찾아달라고 부탁해왔다. 리리코가 성채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니 페리안의 말대로 할 수 밖에 없다....... 이 선택이 틀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시가지 순찰 - 평범한 바람
[ 1번 단서 ]
리리코와 함께 시가지로 가서 페리안이 요구했던 그림을 그리자.
흑관의 본거지를 떠나 리리코와 함께 어쩔 줄 모르는 채로 길가에 서 있었다.
리리코 : 시에나......
리리코 : 미안해요..... 제가 방금 또.... 시에나에게 폐를 끼쳐서.......
페리안과 멀어지자 리리코는 정신적으로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역시 그 사람과 리리코가 함께 두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리리코는 있는 힘껏 자신의 손을 꾹 말아쥐고 고개를 들었다.
리리코 : 아직 포기할 수 없어요―― 후우, 아직은――
리리코 : 리리코, 너는 할 수 있어――
그렇게 몇 번이고 혼잣말을 되풀이한 후,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고자 애썼다.
.......분명히 억지로 버티고 있겠지.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있으니, 그 사실을 들춰내지 말도록 하자.
리리코 : 시에나, 같이 화구를 사러 가요!
리리코 : 페리안이 우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잖아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늘 사용하던 붓 하나 뿐이라, 다른 건 모두 임시로나마 새로 구해야 해요.
리리코 : 이 근처에 제가 자주 가는 화방이 하나 있어요. 일단은 화구부터 사러 가는 게 좋겠어요.
리리코 : 조금 무섭긴 하지만, 그림을 전부 그리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에요. 제가 죽을 각오로 힘낼 테니까!
리리코 : 적어도, 그림을 그리는 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
시에나 : 나도 계속 리리코의 곁에 있어줄게.
리리코 : 네! 우리 같이 힘내요!
화방 주인 : 아! 리리코, 오랜만이구나. 오늘도 화구를 사러 온 거지?
화방 주인 : 자자, 먼저 앉아라. 오늘은 뭘 좀 먹었니? 그래, 설마 저번처럼 또 사흘 내내 굶은 건 아니겠지.....
리리코 : 아니에요! 요즘은 밥도 잘 챙겨먹고 있는걸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시에나가 있으니까......
화방 주인 : 응? 누가 있어서 잘 먹었다고? 정말?
리리코 : 지, 진짜로! 정말이에요! 그렇죠, 시에나.
화방 주인 : 좋아. 믿기진 않지만 알겠다. 친구를 데리고 오다니, 이건 드문 광경이구나.
화방 주인 : 너도 앉아라. 리리코가 평소에 사 가는 재료들은 내가 전부 한 사람 몫씩 남겨 뒀거든. 그런데 종류가 너무 많아서, 다 정리하려면 시간이 꽤 필요하단다.
화방의 주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뒷쪽 창고로 들어갔다.
시에나 : 리리코, 평소에 밥 잘 안 먹어?
리리코 : 윽....... 늘 화구며 재료를 너무 많이 사는 바람에........
리리코 : 광합성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외출하지 않아도 매일 잠깐씩만 햇볕을 쬐면 충분할 테고.......
리리코의 가방에 숨은 성채도 그 말에 동의하듯 가느다란 소리를 흘렸다.
시에나 : .......얘들이 위험한 생각을 하네!
화방 주인 : 뭐가 위험해? 물건은 내가 다 정리했는데, 오늘은 상자를 가져오지 않은 모양이구나.
리리코 : 아! 맞다, 그건 집에 있는데......
화방 주인 : 집까지 가서 상자를 들고 오는 것도 귀찮을 테니, 내가 캐리어라도 빌려주마. 아무튼 여행을 안 간지도 꽤 오래 되었으니까, 다음에는 꼭 가져다 주렴.
리리코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화방 주인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리리코의 어깨를 두드렸다. 리리코가 뭉개지는 게 아닐 정도로 힘이 넘친다.
화방 주인 : 리리코를 곁에서 돌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안심이야. 모쪼록 이 아이를 잘 부탁해.
화방 주인 : 만약 우리 가게의 VIP 단골 손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영업 손실이 오기라도 하면, 나는 사장으로서 엄청나게 고생하게 될 테니까――
시에나 : 그것 때문이었냐고요!
화방 주인 : 하하하하하! 농담이야. 어쨌든, 리리코가 자신에게 너무 무관심하다는 건 사실이니까. 네가 많이 도와줘야 한다!
화방을 나오자, 리리코의 웃음에 아까보다 생기가 돌았다.
시에나 : 화방 주인 분이 널 아끼시는 것 같아.
리리코 : 음, 예전에 제가 그 화방에서 재료를 고르다가 기절했는데, 절 근처 병원까지 절 데려다 주신 분이 그 사장님이세요.
리리코 : 전..... 이 도시를 정말 좋아해요.
리리코 : 처음에 제가 그릴 수 있던 건 오직 고향의 들판 뿐이었지만, 요즘에는 조금씩 이 도시의 모습도 그리고 있어요.
리리코 : 아직은 흑문 때문에 위험한 지역도 많아요. 하지만 접경도시는 누구나 받아들이고, 아주 관대하죠――
리리코 : 시에나는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된 거죠? 천천히 시간을 두고 지내다 보면, 당신도 분명 이곳을 좋아하게 될 거에요.
리리코는 거리 한 편으로 가서 이젤과 캔버스를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리리코 : 시에나, 조금 더 떨어져서 앉아 있어요....... 이 그림들은 아마 당신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리리코의 여러 모습을 보았지만, 이런 평범한 면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림을 제외한다면, 리리코가 가진 삶의 바람은 아주 평범하다.
모든 것이 잘 해결되길. 그녀가 다시 이런 평범한 삶 속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 1번 단서 ]
리리코를 데리고 화구를 사러 갔을 때, 그녀가 화방의 단골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리리코와 한담을 나누는 동안 리리코가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또 그녀가 접경도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직 그녀는 깨닫지 못한 모양이지만, 접경도시는 리리코의 마음 속에 이미 두 번째 고향이 된 모양이다.
일이 어서 해결되고, 리리코가 자신의 평온한 생활 속으로 돌아갈 수 있길 바란다.
항구 도시 순찰 - 천재와 범재
리리코와 함께 항구 도시로 가서 페리안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자. 리리코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만큼, 속도를 붙여서 빨리 끝내야 한다.
항구 도시에 도착한 직후, 리리코는 이전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전에 그렸던 그 그림이 그녀의 기력을 크게 베어먹기라도 한 것마냥, 리리코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보였다.
시에나 : 좀 더 쉬지 않아도 괜찮겠어?
리리코 : 괜찮아요..... 저, 전 정말 괜찮아요.
??? : 어, 리리코 맞지?
등 뒤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리코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리리코 : 아이지! 오랜만이에요.
아이지 : 하이~ 너 오늘 또 수업 빠지고 그림 그리는 거야?
리리코 : 아니에요. 오늘은 다른 일이 있어서......
아이지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리코인데 그림 그리는 것 말고 또 무슨 일이 있겠어. 그래도 출석 관리는 조금 신경 써! 퇴학 당하지 않을 정도라도 좋으니까.
리리코 : 응, 조심할게요. 아이지, 이쪽은 시에나에요. 새로 사귄 내 친구.
》 반가워, 아이지.
아이지 : 내가 전학 간 뒤에 너도 새 친구를 사귀었구나. 다행이다. 거기서 계속 널 걱정하고 있었어.
리리코 : 고마워요. 아이지, 새 학교는 어때요?
아이지 : 그냥 그래. 학교가 다 그렇긴 하지만. 만약 아빠 전근 문제가 아니었더라면 전학 가는 거 싫다고 했을 텐데.
리리코 : 헤헤...... 그래도 아이지는 여전히 씩씩하네요. 요즘도 그림을 그리고 있나요?
아이지 : 그림...... 으음. 나야 뭐...... 아, 이건 네가 그린 그림이야?
리리코 : 아이지! 잠깐만요! 그건 안 돼――
아이지 : 응? 왜 그래?
리리코 : 아...... 괜찮은 거에요.......?
아이지 : 아니. 네가 네 그림이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걸 걱정하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난 언제나 괜찮았잖아.
리리코 : 다행이다........
아이지의 어머니 : 아이지! 왜 여기까지 뛰어온 거니?
아이지 : 아―― 엄마, 금방 갈 테니까――
하이힐을 신은 아이지의 어머니는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리리코를 본 찰나 굳은 표정으로 아이지를 자신의 뒤로 잡아끌었다.
아이지의 어머니 : 넌 왜 아직도 이 애를 보려는 생각을 하는 거야! 너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벌써 잊어버렸어?!
아이지 : 엄마! 됐어, 빨리 가자.
리리코 : 의사.... 선생님.....?
아이지 : 별 거 아냐, 진짜로. 그럼 나 갈게――
아이지는 열심히 그녀의 어머니를 잡아끌고 이 장소를 벗어나려 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꿋꿋하게 버티고 서서 리리코를 응시했다.
아이지의 어머니 : 이 애가 이렇게 된 건..... 바로 너 때문이야. 이 애가 더 이상 그림을 그리기 싫다고 말하는 것도――
아이지 : 엄마! 그만해! 말하지 마!
아이지는 몇 걸음을 돌아와 리리코의 어깨를 잡았다.
아이코 : 우리 엄마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니까 믿지 마. 나 먼저 갈 테니까, 이따가 연락해.
리리코 : 잠깐만! 아이지, 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내 그림을 봐서 그런 거에요.....? 당신도 영향을 받은 거에요?
아이지 : 어어..... 아마 네가 걱정하는 그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지만.......
아이지는 갑자기 한숨을 쉬더니 살짝 미소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조금은 힘이 빠진, 그런 미소를.
아이지 : 그건 그저 네가 그림을 너무 잘 그리기 때문이야. 내가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아진 건.
아이지 :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는 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봐도 정신적으로 해를 입지 않잖아. 그래서 더 깊게 살펴볼 수 있었어........
아이지 : 보면 볼 수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그림 정말 잘 그린다. 대단하다, 너무 아름다워.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 하고.
리리코 : 아이지.......
아이지 :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사실 의사 선생님도 그림을 그리라고 하더라. 어차피 언젠가는 내가 다시 붓을 들게 될 거라고.
아이지 : 하지만 격차가 너무 벌어져 있잖아. 그저 흘긋 봐도 그 차이는 끔찍할 정도로 커..... 바닥 없는 연못처럼 섬뜩한걸.....
아이지 : 봤으니까 알 수 있는거야. 내가 수십 년을 그림에 쏟아 붓는다 해도 네가 있는 곳까지는 갈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어. 그 절망적인 깊은 골짜기를 알아버린거야.
아이지는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지 : 리리코, 계속 그림을 그리기로 한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아이지 : 나는 처음에 너와 함께 네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내 마음은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강하지 않았나 봐. 결국 이렇게 도망쳤잖아. 아하하.
아이지 : 아주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슬프게 한다 해도, 내가 저런 작품을 그려낼 수 있다면........
아이지 : 나는 네가 부러워, 리리코. 너의 그 아픔마저 부러운 거야.
아이지는 말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이 거리에서 멀어져갔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고.
》 리리코.......
리리코 : 괜찮아요, 시에나. 저는 괜찮아요.
리리코 :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걸까요. 아이지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리리코 : 저, 역시 그림을 그리는 것 말고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나 봐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다가, 바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2번 단서 ]
항구 도시에서 그림을 그릴 때, 리리코의 옛 학교 친구를 만났다. 본래는 유쾌하고 즐거운 만남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결말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리리코의 친구는 자신과 리리코의 천부적인 재능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던 나머지 붓을 놓아버렸다.
재능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 또한 존재한다.....
예술이란 정말로 이렇게 잔인한 걸까? 그저 끝까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건 불가능한걸까? 리리코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친구를 잃은 슬픔일까, 어쩔 수 없는 연민일까. 둘 다 아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는 걸까.
하지만 분명한 건 이건 처음부터, 그 누구의 잘못도 없었다는 것이다.
항구 순찰 - 고향
[ 3번 단서 ]
리리코와 함께 항구로 가서 페리안이 요구했던 그림을 그리자. 항구 도시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리리코가 더 우울해하는데, 그녀가 힘을 낼 수 있다면 좋겠다.
걸음을 재촉했다. 아마 리리코도 가능한 빨리 일을 끝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일까, 점차 피로감이 엄습했다. 그때, 갑자기 귓가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성채 : ――――
시에나 : 어째서―― 리리코?!
리리코가 이젤 앞에 쓰러져 있었다.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의자를 박차고 나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도 호흡이 그런대로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건 아마 단순히 기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영향일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조금 늦추었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고 말았다.
시에나 : ..........!!
붙잡혔다. 정신이 색채 덩어리에 부드럽게 휘감기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어둠을 향해 침몰했다.
찰나의 시간, 주위의 소리가 전부 사라진 것만 같았다.
스스스― 스스스스――
벌레 우는 소리.
의식이 어둠 속에 가라앉자 곤충들이 그를 따라 몸을 감싼다.
눈 위로, 머리 위로, 손톱 위로, 입 위로, 가슴 위로, 팔 위로, 전부, 전부―― 빼곡하게――
부드럽고 유연한 몸체와 날개...... 아아, 나방이구나.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거의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어둠 속에 무엇인가가 멈춰 서 있는 것 같았다.
주위의 풍경은 이리도 익숙하고, 이리도 그리운....... 고향의.........
곤충 사이에서 어렵게 입을 벌렸다. 나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조차 알지 못하는 채로, 그저 그것만을 묻고 싶을 뿐이었다.
》 어째서―― 내 세계를 부수려는 거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오직 벌레 소리 뿐이었다.
이어서, 무언가가 낮게 속삭였다.
――문이 열렸다.
리리코 : 시에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리리코가 울고 있었다.
》 나 괜찮아.....
》 울지 마, 리리코......
리리코 : 죄송해요, 죄송해요...... 너무 무서워서, 제가 시에나까지 해친 줄 알고........
시에나 : 나 괜찮아, 그냥 머리가 조금 어지러운 것 말고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림은 어떻게 됐어?
리리코 : 이미 치워버렸어요. 그림을 그리다가 기절해버렸는데, 시에나가 그걸 보고 나서.......
시에나 : 예전에 너희 집에서 그림을 볼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페리안은 네게 대체 뭘 그려 달라고 한 거야?
리리코 :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은 그저 제게 각 지역의 풍경을 그려 보라고 했을 뿐이에요. 그 사람이 찾고 있는 그 분이 만약 흔적을 남겼다면, 제 그림이 그 흔적을 담아낼 거라고 말이에요.
리리코 : 그건 성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리리코 : 이전 그림도 그랬지만, 본래의 도시 풍경을 그리고자 해도 그림을 완성시키는 순간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리고 말아요.
리리코 :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냥 쌓아뒀는데.........
즉, 이 그림들을 그리는 목적은 변해버린 그림을 통해 페리안이 만나고자 하는 그 존재를 찾기 위해서다.
방금 보였던 게, 혹시 페리안이 말했던 '신' 일까?
아니다. 어쩐지 아닐 것 같다. 기괴하고 이질적이긴 했지만, 완전하지 않아 보였으니까......
리리코 : 우리 돌아가서 좀 쉬어요, 시에나.....
시에나 : 응. 너도 너무 자책하지 마. 이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잖아.
리리코 : 네......
리리코 : 이제 마지막 한 장 남았어! 리리코! 조금만 더 버텨!
리리코가 힘껏 자신의 뺨을 두드리며, 붓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리리코 : 조금만 더 견디면...... 곧 전부 끝날 테니까.
[ 3번 단서 ]
너무 피곤했는지 리리코가 그림을 그리다가 기절했는데, 그녀를 도우려다 본의 아니게 화폭에 그려진 것을 들여다 보고 말았다.
비록 내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다시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캔버스를 통해서, 나는 꼭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고향'을 바라보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지기 직전, 리리코가 날 깨워준 덕분에 모든 것이 평소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리리코로부터 전해듣기로는, 페리안은 어떤 존재의 흔적을 찾기 위해 리리코에게 이상한 작품을 그려줄 것을 의뢰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와 협력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흑관이 모시는 '신' 이라는 건, 대체 뭐지?
구 시가지 순찰 - 걸작
리리코와 함께 구 시가지로 가서 페리안이 요구한 그림을 그리자. 이것이 마지막 그림이니, 리리코와 함께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리리코가 마지막 한 획을 그었다.
리리코 : 이게 마지막이에요........ 완성했어요.
리리코 : 잘 됐어요, 시에나. 저 드디어.....!
잔뜩 들떠있는 리리코와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녀는 작품을 가방에 정리했다.
리리코 : 저기..... 시에나,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같이 가 줄 수 있나요?
리리코 : 지금까지는 감히 갈 수 없었어요. 제겐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그래도 역시......
》 리리코가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데?
리리코 : .......그 노신사분의 본가에요.
애쉬 : 당신이 바로 리리코군요...... 아빠가 예전에 자주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거든요.
리리코 : .......안녕하세요.
리리코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온통 하얀 색 투성이의, 애도로 가득한 이 작은 방을 보며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결국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애쉬 : 당신 덕분에 많이 웃을 수 있었어요. 저도, 아빠도 둘 다 그다지 다른 사람을 사귀는 재주가 없어서 아직 아무도 안 왔거든요......
애쉬 : 아빠가 만약 당신이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알았다면, 정말 기뻐했을 거에요.
리리코 : .........
애쉬 : 아가씨, 슬퍼하지 말아요. 아빠는..... 경찰 쪽에서도 조사를 계속하고 있으니 곧 좋은 결과를 들을 수 있을 거에요.
애쉬 : 딸인 제가 말하면 천하의 몹쓸 불효자식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가 봤을 때는 말이죠. 아빠가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였다고 생각해요.
리리코 : 죄송해요......
애쉬 : 어,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 실제로 그런 늦은 시간까지 밖에서 그림을 그리면 위험할 법도 하죠.....
리리코 : 저는........ 흑.......
애쉬 : 뚝! 아빠가 당신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당신이 마음 맞는 좋은 친구라고 말하곤 했어요.
애쉬 : 저는 그림을 그린다던가 하는 일에는 흥미가 없어요. 재능도 없구요.
애쉬 :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렸을 때부터 아빠 자신도 모르게 실망감을 내비칠 때가 있었거든요..... 저는 지금까지도 아빠와 별로 친하지 않아요.
애쉬 : 아빠가 집에 돌아오면 오히려 당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했죠.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을 당신이라면 이해했을 테니까. 아빠는 아마 저보다는 당신을 더 가족 같다고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애쉬 : 따라와요. 이게 아빠의 마지막 그림이에요. 전 분명 아빠가 당신이 이걸 봐 주길 바랐을 거라 생각하니까요.
애쉬는 몸을 일으켜, 느린 걸음으로 안쪽의 방까지 우리를 안내했다.
시에나 : 리리코, 할 수..... 있을 것 같아?
리리코 : ........네.
방 안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고, 정 중앙에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윗쪽에 하얗게 눈이 쌓인 설산의 모습이 비친다. 구름과 안개에 서 있는 환영이 보일 듯한, 하얀 눈에 먹히는 듯한 그림이었다.
애쉬 : ......아무리 저라고 해도, 이게 대단한 작품이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어요. 죽기 전에 이런 걸작을 그릴 수 있어서 행복해 했겠죠.
리리코 : 그 분께서는..... 어째서 설산을 그리고자 하셨던 걸까요?
리리코 : 예전에 여쭈어 본 적이 있지만, 결국 제게 이유를 말해 주시지는 않으셨어요.
애쉬 : 누가 알겠어요..... 그 이유 또한 제 추측일 뿐이죠.
애쉬 : 저희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줄곧 그곳에 가고 싶다고 하셨나 봐요.
애쉬 : 사실 엄마도 아빠도 설산에 가본 적이 없는데도요. 이 설산은 그저 두 분의 꿈 속에 존재하는 풍경이에요.
애쉬 : 아가씨. 저도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왜냐하면 전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래서 당신에게 답을 구할 수밖에 없어요.
애쉬의 목소리가 다소 가라앉았고, 불안한 듯 물어왔다.
애쉬 : 이 그림이..... 어떻게 보이나요?
리리코 : .........
리리코 : 정말 대단해요. 걸작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애쉬 : ......잘 됐다.
애쉬 : 고마워요, 아가씨.
애쉬 : 들려? 아빠, 당신은, 어쨌든간에 이류 화가가 아니었어요.
애쉬 : 그러니까.... 편히 자요.......
리리코 : ...........
리리코와 함께 그 집을 조용히 떠나 밖으로 나왔다.
리리코 : 시에나, 그림을 그린다는 건....... 정말 잔혹한 일이네요.
리리코 : 그거 알고 있어요? 방금 그 그림을 본 순간,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요――
리리코 :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해도, 그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거라고. 그리고 그 분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라고요.
리리코는 온 몸을 떨며, 자신의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리리코 : 저는.........
》 리리코,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 편히 울 수 있도록 그녀를 끌어안자.
리리코 : 윽....... 으아아아아아앙..........
리리코 : 분명, 분명 죽는 건 끔찍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런데도......
리리코 :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저는..... 슬픔을 느낄 수 없었던 거에요.......
리리코 : 그저 멍하니 생각했어요. 정말 대단하다고, 정말 아름답다고, 이런 걸작을 그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리리코 : 자꾸만, 그 분도 틀림없이 저처럼 생각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분명 내가 그 사람을 죽여버렸는데도!
리리코 : 저는 정말.......
소녀는 품 속에서 울었다. 떨면서,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정말로, 그녀가 말한 것처럼 이렇게나 잔혹한 일인 것일까?
대답할 수 없으니, 그저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그림은 이미 완성되었으니, 남은 일은 페리안에게 맡기자.....
이 모든 것이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
[ 4번 단서 ]
순조롭게 마지막 그림을 완성시켰고, 리리코가 내게 돌아가신 노신사분의 가족을 보러 가고 싶다는 부탁을 해 왔다.
그 분의 따님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는 노신사가 마지막 작품을 완성했을 때 얼마나 열광했을지, 또 예술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이 남기신 유작을―― 일류 예술가의 걸작을 보았다.
노신사분의 본가를 떠났을 때, 리리코는 더 이상 얼굴에 띄운 웃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아프게 울고 또 울었다.
리리코는 성채의 영향을 받아 미쳐버리고, 결국 세상을 떠난 노신사를 향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리코는 그 작품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해줄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 뿐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수밖에.
최고의 걸작을 그려낼 수 있다면, 설령 죽음으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해도 리리코는 망설임 없이 색채의 세계로 달려나갈 것이다. 그곳은 가장 순수한 동시에 가장 잔혹하다.
그녀는 단지..... 줄곧 그림을 그려왔을 뿐인데도.
3일차, 밤 - 구 시가지
하루 종일 리리코를 데리고 접경도시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가, 해가 다 지고 나서야 흑관의 거점으로 돌아왔다.
이곳의 방도 급조한 것이라, 아주 기초적인 가구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결코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리리코의 침대는 바로 맞은편에 있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은 채 한참을 멍하게 있더니, 자신의 뺨을 약하게 두드리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리리코 : 저기, 시에나......
리리코 : 제가 시에나의 초상화를 그려도 괜찮을까요?
리리코 : 오늘 낮에는 계속 무서운 것만 그려서, 붓을 드는 게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리리코 : 시에나와 함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어요.
리리코 : 시에나, 저는...... 분명 이상해진거겠죠........
마치 다른 식물에 기생하는 덩굴과 같다. 끌려가면 생명력을 빼앗긴 채 쇠약해져 죽을 것이다.
지금 리리코의 몸에는 마치 연약한 착생 식물처럼, 쉽게 부스러질 숨결이 강렬하게 퍼져 있었다.
리리코 : 저는, 전 이미 많은 것을 잊은 것 같아요. 정신이 나간 것 같기도 하고, 붕 떠서 실감이 나지 않기도 해요......
리리코 : 하지만 시에나를 잊고 싶지 않아요! 그림으로 그려 둔다면, 분명. 분명――
리리코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도록 할 수 밖에.
》 움직이면 안 돼?
》 이 포즈로 괜찮아?
리리코 : 상관 없어요. 그냥 시에나가 마음 내키는 대로 편하게 앉아 있는 걸로 충분해요.
리리코 : 그럼, 시작할게요......
리리코가 나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이게 정말 그녀가 말한 것처럼 조금이나마 안온함을 가져다 주었으면 좋겠다.
▷ 3일차 종료, 2일차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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