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 유해 누르의 거대한 몸이 도시 중앙에 바짝 다가붙었다.
원래 눈으로 뒤덮여있던 곳은 높이 쌓여있던 눈이 녹은 후, 뱀의 혀와 같은 불길이 땅에서 솟아올라 도시의 땅을 집어삼키고 있다.
안화 : 마지막으로 작전을 점검해볼까.
안화 : 누르와 레이첼은 에뮤사와 다른 신기사들이 엄호. 연구소 부지로 이동해서 환력 장치를 가동시키고, 누르가 유해 누르의 의식과 안전하게 접촉할 수 있게 함으로써 유해 누르의 의식을 방해한다.
누르 : 응. 누르는 이미 준비가 끝났어.
안화 : 시에나는 남아있는 모든 신기사들을 이끌고 관광 타워 전망대로 가. 그 유해의 이동 경로에 따르면 그녀는 오늘 반드시 그곳을 지날거야. 우리는 바로 그곳에서 그녀를 저지한다.
》 알겠어.
》 준비됐어.
안화 : 그동안 나와 사토미 아카네는 중앙청에 남아 데이터를 분석하고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해서 지휘를 내릴 린다.
아카네 : 문제 없어요. 맡겨주세요.
안화 : 중앙청은 과거에 유해 누르와 대치한 적이 있었어. 이걸로 벌써 두 번째군. 여기서 마무리짓자.
누르 : 여기선 그 유해가 엄청 잘 보이네.......... 조금 있다가 시에나가 전투를 시작하면 그들이 싸우는 모습도 보일 것 같아!
레이첼 : 뭐,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 없을 것 같네. 너도 이 일이 위험하다는 것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을 테고.
누르 : 레이첼 씨 말이 맞아. 한 번 실패하면 의식채로 잡아먹힐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누르는 믿어. 실패하지 않을 거야.
레이첼 : 좋아. 네가 충분히 생각해본 것 같으니까, 나 역시 막지는 않을거야.
레이첼 : 이 기계는 그저 가장 일반적인 훈련 보조 장치일 뿐이야. 네 환력 안정이나 '외부 요인'으로 인해 '그 장소'를 떠나지 않게끔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실제적인 전투는 의식의 대항으로 이뤄지는 만큼 모든 건 전적으로 네게 달려있지.
누르 : 응!
누르는 눈을 감고 기계 위에 누웠다. 어느 순간부터 실험실 안에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요함 속에서 기계가 내는 전자음만이 낮은 소리로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소녀는 마지막으로 의식의 황야에 다다랐다.
이 순간의 황야는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이미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는 꽃송이가 만개해 있다.
꽃으로 만들어진 바다의 끝자락에는, 결정의 굴레이세 벗어난 유해 누르가 산과 같은 모습으로 이 대지에 서 있었다.
이 의식의 황야 위에서, 그녀는 이전의 몇 배나 되는 자태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유해 누르 : 나는 알고 있었어..... 네가 올 거라는 걸......
유해 누르 : 왜냐하면.... 넌 이걸 위해 태어났으니까......
누르 : ......처음부터, 너는 이미 알고 있었구나.
유해 누르 : ......하하, 그거야, 모든 게 너무, 딱 맞아 떨어졌잖아......
유해 누르 : 나는 이 윤회 속에 갇혀있고, 너는 이 윤회에 나타났지. 너는 나와 꿈 속에서 만났지만, 내 세계는 네게 조금씩 삼켜졌어.
유해 누르 : 넌 어떻게 이곳에 왔지? 아니,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널 보낸 사람은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테니까.
유해 누르 : 네가 나를 잡아먹고, 나를 대신해서 '신'이 되길 기대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 사람은 그녀의 목적이 허사가 되리라곤 생각치도 못했을 걸.
유해 누르 : 왜냐면, 너는 그저 생을 나누기만 할 뿐 죽음엔 직면하려 하지 않는 검쟁이니까.
누르 : 틀려, 아니야......!
유해 누르 : 내 말이 틀려? 지금도 네 손에 쥐고 있는 건 녹색의 생명의 힘이지, 누렇게 시든 죽음의 힘이 아니잖아.
유해 누르 : 네가 어떤 경우에도 네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하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았어?
유해 누르 : 이게 바로 네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결과야. 넌 겨우 이 정도 각오로 나에게 덤비려고 한 건가? 말로는 다 못할 만큼 실망스럽기 짝이 없어!
유해 누르 : 누르, 넌 우리의 신기가 세계를 빚을 때 뭘 사용하는지 알아?
유해 누르 : 창조신들은 티아매트의 시체를 둘로 나누고, 하늘과 땅의 별, 바람과 천둥, 폭풍과 비를 만들어 이 세상을 세상을 탄생시켰다."
유해 누르 : '죽은' 땅에 '살아 있는' 열매가 있어야만......
유해 누르 : 생명은 태어난 그 순간에 숨을 빼앗기는 일도 있어. 세계는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
유해 누르 : 그러니까, 네가 '죽음'을 포기한 순간 너는 이미 진 거야.
상식을 뛰어넘은 위압감이 유해 누르의 몸에서 퍼져나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유해 누르 : 시작하도록 해, 내 반신.
유해 누르 :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나는 여기서 죽을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모든 규칙을 어겨서라도 널 이길 거야.
유해 누르 : 우리 둘 중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지. 네가 내 시체를 넘어 새로운 '신'이 될 수 있을지 내가 시험하겠어!
아카네 :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너희는 방금 유해 누르의 오백 미터 범위 안으로 들어갔는데, 주위 신호는 제대로 잡히고 있어?
》 잘 들려.
》 잘 안 들려.
아카네 : 미안하지만, 헬기가 너무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어. 잘못하면 공격당할 수도 있으니까, 공중 투하 형식으로 너희를 이곳에 내리는 방법뿐이야. 그 다음에는 너희가 직접 올라가야 해.
아카네 : 데이터 상으로는 그 주변의 환력 농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어. 지금 빨리 관광 타워로 가. 그렇지 않으면 신기사들이 위험해질거야.
아카네 : 어서! 유해 누르가 오고 있어!
관광 타워 가장자리에 유해 누르의 몸체가 나타났다.
엄청난 크기의 괴물이었다. 거대한 체구는 체육관처럼 넓었고, 강인한 사지는 도로변의 모든 건물들을 모조리 뭉개벼렸다.
결정은 그녀의 몸에서부터 대지를 향해 점점 자라났고, 죽음의 기운이 바깥으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카네 : 이 유해 누르는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흑문 몬스터보다도 더 강하니까, 방심하지 마!
》 방심할 리가 없잖아.
》 네가 응원해 준다면
아카네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녀 머리 위에 작은 코어나 확인해―― 평범한 누르의 축소판처럼 보이는 저거 말이야.
아카네 : 지금 그녀가 조용히 코어를 열어두고 있는 걸 보면, 누르의 작전이 성공한거야.
아카네 : 다음은 너희 차례야. 그녀를 멈추게 할 방법을...... 잠깐, 이 수치는 대체 뭐야!
아카네 : 망할 시에나, 주변 환력 농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어. 300%, 330%, 430%....... 아직도 계속!
아카네 : 이성을 잃고 더 강해진 것 같아!
니유 : 으윽...... 이게 다 뭐야, 못 일어나겠어........
아사나 : 아아...... 아파요.... 어깨가 무거워..... 못 걷겠어........
주위의 신기사들이 하나 둘씩 쓰러졌다. 그들을 짓누르는 환력을 조절하려 해 봤지만, 효과는 아주 빈약했다.
환력은 본래 공기처럼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이 공기가 무게를 갖게 된다면 매 순간마다 사람을 무너지게 할 수 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유해 누르의와 대치는 커녕 일어서는 것도 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지?!
??? : 손을 뻗어서, 주변의 환력을 가슴에 모아 봐.
시에나 : 누구야? 누가 있어?!
??? : 다시 환력을 펴, 결계를 펼치듯이. 이 주위 공간을 모두 덮을 정도로.
아카네 :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시에나, 네 주위에 방주의 결계가 생겼는데?
시에나 : 내가 방금...... 방주의 결계를 펼쳤어. 내 심장의 방주 파편을 써서!
아카네 : 방주의 결계가 틀림없어. 하지만 앙투아네트의 노아의 방주뿐만이 아니야.
아카네 : 만약 네 심장의 그 조각을 하나의 '전송 포인트'라고 볼 때, 지금 이 순간 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결계에서 엄청난 양의 이상한 시공류가 나타나고 있다고!
아카네 : 그러니까 이건..... 네가 오직 떠올리기만 한다면, 여기에서 모든 신기사를 소환해낼 수 있다는 뜻이야.....
》 무슨 뜻이야?
》 나 잘 못 알아듣겠어!
아카네 : 못 알아들어도 상관 없어.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이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거야. 시에나!
아카네 :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신기사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그들을 여기로 불러내도록 해. 신기사들을 지휘해서 유해 누르의 머리 위에 있는 작은 코어에 직접적으로 충격을 줘!
아카네 : 짜증나네.... 승부욕이 타올라.
아카네 : 신기사의 공격은 아주 강했지만, 역시 이 몸집은 너무 커....... 코어도 너무 단단하잖아. 시에나, 남은 전력은?
》 이젠 아무도 없어.
》 분명 누군가 있을 거야!
??? : 하하, 정확하네. 시에나.
방금 귓가에 속삭였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소리는 더욱 가깝고 진실됐다.
암사 앙투아네트 : 오랜만이야, 소녀.
암사 앙투아네트 : 날 기억하고 있어?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고 있니? 어느 쪽이든 상관 없어. 도미노는 이미 첫 번째 패를 쓰러트렸으니까.
암사 앙투아네트 : 내가 당신에게 심었던 방주 조각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거야. 거기서 잘 보고 있도록 해.
방주가 불러낸 또 하나의 신기사가 쓰러졌지만, 모든 신기사들의 공격에 짓눌려 겨우 서 있었던 괴물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아카네 : 유해 누르의 영구 손상이 50%를 초과했어! 그녀는 대체 누구야....? 무시무시한 힘이야!
암사 앙투아네트 : 나는 앙투아네트야. 사랑스러운 정보원 친구.
아카네 : 에, 에에? 앙투아네트? 설마, 다른 시공의 앙투아네트라고?!
암사 앙투아네트 : 이건, 우리가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봐. 지금 그녀가 흑문을 열고 있어.
아카네 :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거야!?
암사 앙투아네트 : 처음 흑문을 연 장본인이 바로 '그녀'니까. 이미 한 번 저질렀던 일을 다시 벌이는 건데 뭐 얼마나 큰 문제가 있겠어?
유해 누르는 두 팔을 하늘로 뻗어 구름층을 잡고, 맹렬하게 사방으로 찢어 버렸다. 언어를 구사할 수 없는 괴물의 울부짖음 속에서 허공이 찢어졌으며 하늘에는 거대한 흑문이 나타났다.
그녀의 몸은 칠흑 같은 구름으로 휩싸여 점점 더 거대해졌다.
아카네 : 그녀는 흑문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어...... 환력 농도가 또 급증할거야! 이대론 안 돼. 이 수치는 이미 시스템의 표기 상한선을 완전히 넘어섰어.
유해 누르 : .......제약을 없애.... '규칙 위반'을 하더라도..... 상관 없어.......
유해 누르 : 존재할 수만 있다면..... 살아.... 남을 수만 있다면.......
암사 앙투아네트 : 내 뒤로 가, 시에나. 그녀는 이미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어. 규칙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으려 하고 있는거야.......
암사 앙투아네트 : 흑문의 에너지를 흡수하면 그녀의 육신과 힘은 더 강해지겠지.
》 규칙을 어긴 저건 어떻게 공격하면 돼?
》 우리에게 어길 수 있는 규칙이란 게 있어? 그게 뭐야?
암사 앙투아네트 : 어머? 긴장할 필요 없어. 그런 게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어.
바로 그 순간, 거대한 짐승의 우짖음이 온 하늘에 울려퍼졌다. 그것은 마치 시공간의 틈으로 보이는 일그러진 악마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일곱 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가 칠흑같은 구름 위에 나타났고, 흑문을 넘어 이곳으로 다가왔다.
암사 앙투아네트 : 흥, 드디어 행차하셨군.
유해 누르의 몸이 본능처럼 움츠러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올라가 응전했다!
그저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와 유해 누르의 그림자가 맞부딪쳤을 뿐이었지만, 굉음과 함께 몰아친 폭풍이 이 도시 전체를 휩쓸었다.
폭풍 속에 눈앞의 정경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아카네의 지시음만이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아카네 : 시에나, 어떻게 된 거야!? 유해의 생명력이 빠르게 약해지고 있어. 시공류 혼란 수치도 최고 수준이야!
아카네 : 지금 최후의 일격을 가해야 해.
》 무슨 방법이 있어?
》 아직 더 싸울 수 있어.
아카네 : 나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어. 이 미친 폭풍 속에서도 날 생각해서 물건을 날려버리거나 하지는 말고――
아카네 : 그런데 안화가 금방 돌아온다고 했는데..... 안화 씨?! 이건 제 크세이트 아니에요!?
안화 : 그래. 용량 한도를 높여 여덟 개의 흑핵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게 된 이 기계의 강도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뚫거나 그 그림을 부수고도 남지.
안화 : 그리고 내 신기인 호루스의 눈은 네가 유해의 약점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는 걸 도울 수 있어. 여기에서라면 유해 누르와 그녀 뒤의 저 흑문을 직접 꿰뚫을 수 있을 거야.
안화 :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야. 네가 발사를 지시해. 내가 목표를 조준하지.
아카네 : ......알겠습니다. 조작은 제게 맡겨주세요.
광풍 너머의 중앙청 쪽에서 호루스의 눈이 발하는 환력이 느껴졌다.
아카네 : 전달받은 좌표 위치 확인 완료. 궤도 재조달 완료. 예열 준비 완료. 에너지 충전 완료―― 발사!
황야에서의 전투는 거의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날개를 펼친 유해 누르가 누르를 강하게 날려보내 꽃밭에 내동냉이쳤다.
유해 누르 : 내가 말했지!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고!
누르 : 으....... 흑...... 하지만 네게 히로가 있었던 것처럼, 누르에게도 시에나가 있어.
누르 : 시에나는 누르를 믿고 여기로 보내줬어. 누르가 새로운 희망을 찾길 바라면서.
누르 : 그러니까, 누르는 그 믿음에 답하고 싶어!
유해 누르 : ......시시한 소리 좀 그만 해.
유해 누르 : 너는 널 이곳에 오게 한 게 아이솔린이 아니라 시에나라고 믿는 거야? 기억을 잃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 약한 인간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지?
―― "이것 때문이야."
유해 누르의 몸에서 약간 친숙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놀라서 몸을 돌렸다.
누군가가 총구를 들이댔다.
세라핌 : ........그건... 우리 모두, 혼자서 싸우는 게 아니니까.
방아쇠가 당겨졌다.
신을 죽이는 총알은 단 한 번에 목표물을 명중시켰가. 유해 누르의 심장 부근에서 눈을 찢을 듯한 빛이 터져나왔다.
유해 누르 : 이건.... 이건 대체 뭐야? 세라핌? 아니... 어떻게.... 설마 너도 방주를 통해 여기 온 거야?! 이건 또 뭐고!
세라핌 : 난...... 그저...... 지나가는 길에..... 고쳐야 할 것을 고쳤을....... 뿐이야.......
세라핌 : 규칙을 어긴 체스 말은 똑같이 규칙을 어김으로써 제거야해 해. 이건.... 어느 말 못하는 신을 대신해서.... 갚아주는 거야!
세라핌의 몸이 빛났고, 인과가 찢어져 뿔뿔히 흩어졌다.
유해 누르가 심장을 부여잡았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되자, 거대한 몸은 총알이 박힌 자리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동안 그녀의 봄 4분의 1이 무너져내렸다.
유해 누르 : 소용없어.....
유해 누르 : 그녀가 날 이기더라도....... 그녀는 내가 될 테니까...... 왜냐하면..... 나는.... 너의.........
누르 : 아니, 넌 그저 누르의 한 가지 미래일 뿐이야!
소녀는 몇 걸음 뛰어가 꽃으로 이루어진 바다 속의 유해 누르를 바라보았다.
누르 : 그 사람이 누르를 보냈을 때 이렇게 말했어―― "네가 악한 신이 될 미래가 존재한다면, 그건 반대로 선한 신이 될 미래 역시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라고. 누르는 바로 그 길을 찾기 위해 여기에 온 거야!
유해 누르 : 네가...... 그런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면.... 그렇다면 너는.......
유해 누르 : 당연히..... '나'와 같은 미래를 맞아야 할 거 아니야!
누르 : 누르는 네가 겪었던 모든 일을 이해해. 하지만 '나'는 너와 달라.
누르 : 누르는 확신할 수 있어. 다시 한 번 같은 일을 겪게 된다 하더라도 너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거야.
누르 : 누르는 새로운 신분으로 계속 살아갈거고,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어야 했는지 같은 문제도 생각하지 않아. 지금 여기 있는 내가 진짜 나고, 내 안에 존재하는 미래가 널 대신할거야.
누르 :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아니야. 그러니까, 누르는 네가 말하는 '미래'를 부정할거야!
누르 : 너는 아까 누르가 생명의 힘으로 널 이길 수 없다고 말했었지..... 고개를 숙여 봐.
유해 누르 : 이 꽃들은..... 대체 언제...... 너, 계속 인도할 셈이야?!
유해 누르는 경계하며 꽃 가까이로 다가가지 않으려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꽃의 바다 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꽃줄기가 유해 누르의 몸을 타고 자라났다. 푸르른 환력이 꽃송이 위에 점점이 박혀 줄기로 뻗어나갔고, 유해 누르의 몸 속에 박혀 탐욕스럽게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유해 누르 : 비열한 개자식! 놔! 이럴 리가 없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누르 : 생명과 죽음은 양면적이고 대립적인 게 아니야. 생명은 나눔이, 흡수와 전환, 그리고 계승이 필요하니까.... 죽음도 생명의 일종이야. 마치 네가 나를 대하는 것처럼.
누르 : 분노, 슬픔, 우짖음, 두려움, 도피. 도피하고 있는 당신의 모든 것은 누르에게 선명히 보여.......
누르 : 누르는 이제, 도망치지 않을거야.
황야에는 더 많은 꽃송이가 피어났다. 생그러운 꽃으로 자신의 시체를 부숴 생명을 취하는 동안, 소녀는 세계의 법칙을 깨닫고 말았다.
눈부신 빛이 흩어졌다. 누르의 눈에 꽃밭 한가운데 선 금발의 여성이 비쳤다.
누르 : 여기는.......
아이솔린 : .......이곳에 온 걸 환영해. 오랜만이네. 새로운 모습이구나, 누르.
누르 : ......이 모든 건, 당신이 계획한 거야?
아이솔린 : 아니. 이번만은 나도 속았다고 해야 할 것 같네.
아이솔린 : 본래 세라핌의 모형정원에는 일종의 '은폐 장치'가 있었어. 불온한 것과 뒤틀린 것 모두 그 힘에 의해 가려졌지.
아이솔린 : 그러나 그녀가 모형 정원 위에 군림하는 대신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하자 그 장치는 고장이 나고 말았어. 이게 바로 '눈'이 내리기 시작한 이유야.
아이솔린 : 그것과 동시에, 흑관이 신을 부르기 위해 그린 그림은 생각치도 못한 이변을 낳았어....... 그리고 그 잔상은 성채를 가진 소녀와 합쳐져 상자 속의 괴물이 되었단다.
아이솔린 : 그게 본능적으로 회복의 시간을 앗아가기 때문에, 복구가 다 끝나기 전까지 이 모형정원의 시간은 지금처럼 윤회가 끝나기 전에 멈춰있는거야.
누르 : 그렇지만..... 네 능력으로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지 않아?
아이솔린 : 모형정원의 인과가 방주에 의해 엉켜버린 후, 나는 꽤 오랫동안 윤회의 결말과 그 경위를 분명하게 보지 못했어.
아이솔린 : 게다가, 나는 내 제멋대로인 학생에게 그녀의 인생에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이미 약속해버렸거든. 그러니까 이번 정세는 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한 일은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였으니까.
아이솔린 : 이런 상황에서는 몇 명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시에나가 잘 해줬어. 나도 결국 이걸 내게 준 이유를 알았고 말이야.
그녀의 손에는 단말기를 닮은 물건이 들려 있었다. 손에 들린 그것에서 익숙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 깜짝 놀란 모양이네, 아이솔린.
누르 : ............
》 짧은 윤회 속 그 좁은 틈새에서.........
시에나 : 비록 짧은 윤회 속 아주 좁은 틈새에서도, 나도 이 정도 계획쯤은 세울 수 있어.
》 미래를 부정하는 동시에......
시에나 : 미래를 부정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래가 태어나기 마련이니까.
시에나 : 같은 신이라도, 매번 내키는 대로 규칙을 부수는 악한 신보다는 누르에게 한 번 더 걸어보는 게 나아.
》 나는 내 동료를 믿어......
시에나 : 나는 내 동료를 믿어. 누르라면 분명히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시에나 : 그리고 우리를 도와줄 거야.
》 힘을 모아서....
시에나 : 이야기 속에서 힘을 모을 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어.
시에나 : 이계에서 온 신기사가, 좁은 틈새에서 온 친구가.
시에나 : 때때로 기억이 없는 나는 그들을 잊기도 해.
시에나 : 하지만 그들은 나를 잊은 적이 없어.
시에나 : 바로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겨우 오 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너와의 이야기를 쌓아올 수 있었던 거야.
》 내가 여기 있는 걸 허락해준다면, 나도 작은 경고를 해 줄게.
시에나 : 눈이 녹으면 이 세계는 혼란에 빠질거야. 세계의 어두운 부분이 모두 겉으로 드러나겠지.
시에나 : 하지만 나는 이미 각오하고 있어.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의 인생에도 관여하지 말아 줘.
아이솔린 : ......도발이 제법이구나.
누르 : 넌...... 허락하는 거야?
아이솔린 : 안 될 건 뭐야? 시에나는 나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였고, 그 방법으로 가장 큰 변수를 제거했잖아. 그러니까 나도 모형정원의 회복을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지.
아이솔린 :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야.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정말로 완벽한 길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아이솔린 : 보렴, 너는 곧 찾게 될 거야.
누르 : ......나는 내가 완벽하게 행복한 길을 찾아냈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르 : 나는 그저 어떤 마음으로 생명과 죽음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배웠을 뿐이니까.
누르 : 인간들의 전설 속에서는 티아매트가 죽었을 때 그녀의 시체에서 이 세계가 탄생했다고 전해지지.
티아매트 : 내 눈에는 당신의 '균형' 역시 세라핌의 '행복'과 같이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보여.
아이솔린 :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예전부터 생각했지.
아이솔린 : 상관없어. 네가 너 자신의 이론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나에 반박할 수 있으니까.
아이솔린 : 다만, 난 다시는 너라는 변수를 모형정원 안에 들이지 않을 생각이야. 그러니 이번이 네가 이 정원에 들어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겠지. 가서 네가 하고 싶은 일들을 모두 끝내고 오도록 해.
누르가 떠나기 직전, 아이솔린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아이솔린 : 대답해 봐. 너는 그 악의에 차 있던 너 자신을 그리워할 수 있니?
누르 : 그녀는 사라지지 않았어. 계속 여기에 있지.
누르 :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눈으로 감출 수 없는 어두운 부분이 있어. 하지만 괜찮아. 지금 여기 서 있는 승리자는 나니까, 그걸로 충분해.
아카네 : 명중했다......!
광연한 폭음 속. 산처럼 거대한 괴물의 몸이 흔들리고, 무너지고, 갈라진다.
암사 앙투아네트 : 그녀의 몸이 무너지고 있어. 거기 멍하니 있지 마, 시에나. 빨리 나를 따라와!
산을 닮은 괴물의 몸은 대략 10분에 걸쳐 무너져내렸고, 코어가 있던 그 부분에 차츰차츰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암사 앙투아네트 : 저건......
》 누르?!
누르 : ......여러분, 무사해요? 나.... 유해 누르를 이기고 왔어요.
아카네 : 너.... 너 누르야?!
아카네 :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자라다니....... 저 유해 누르의 몸이 어떻게.......
아카네 : 와...... 이건, 이건 정말 치사한데.
레이첼 : 왜왜왜? 와, 이거 진짜 대단한데. 누르, 너 역시 누르 맞지? 이리로 돌아오면 꼭 내가 네 몸을 잘 연구하게 해 줘야 해――
누르 : 저기, 시에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말해주고 싶어. 잠깐 따라와 줄래?
누르로부터 이 모든 일의 전말을 들었다.
누르 :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 이야기야.
누르 : 네 계획 덕분에, 나는 이 모습이 될 수 있었어. 네 노고와 배려에 정말 감사하고 있어.
누르 : 지금의 나는 손쉽게 그 그림을 망가트리고, 이 세계의 윤회를 회복시킬 수 있어. 하지만 그보다 먼저 찾아올 이 세계의 파멸은 피하게 할 수는 없어.
누르 : 지금의 나는 파멸이 두렵지 않아. 하지만 나는 네가 내게 '이제 괜찮아.'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릴거야. 그때 갈게.
시에나 : 그럼.... 그 전에는?
누르 : 그 전에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누르 : 그 전까지는, 너희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갈 거야.
누르 : 네가...... 지겨워질 때까지.
― 많은 해가 지난 후.
그 신은 스스로 얼어붙은 모래시계를 건드렸다.
― 도시는 모래시계가 한 바퀴 돌아가는 동안 산산히 부서졌고, 그에 따라 모든 생명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윤회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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