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아침, 중앙청
오늘 아침, 온 도시에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다.
사이렌 소리가 어지럽게 울렸고, 감시실에서 지쳐 널브러져 있던 우리는 안화의 부름을 받고 중앙청 회의실에 도착했다.
안화 : 모두 모였군. 우선 이걸 보도록 해.
중앙청의 감시 카메라 화면에는 하얗고 거대한 무언가가 지면을 으스러트리며 기어나오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이전에 보았던 어떤 흑문 몬스터와도 다르다. 눈앞에 거대한 괴물은 기괴한 아름다움과 파괴를 지니고 있다.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거수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누르 : 이건..... 누르..... 하지만 너무 커. 이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얻은 거지.....
아카네 : 유해의 흔적을 검출했어요! 지휘사의 흔적도 유해의 심장 부근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아카네 : ......이건 히로야! 하지만 너무 멀어. 다른 걸 더 세밀하게 분석하려면 좀 더 가까워져야 해요.
안화 : 흠. 보아하니 히로의 유해화 실험은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야.
안화 : 만약 그가 성공했더라면 가장 완벽한 실험체를 사용했을거야. 정말이지 꼴사납군.
안화 : 사토미, 저 몬스터의 각종 수치를 분석해 봐.
아카네 : 네. 지금 하고 있어요.
아카네는 안화에게 다가가 패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와 거의 동시에 눈을 찌르는 붉은 빛을 동반한 사이렌 소리가 온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아카네 : 검사에서 도출된 환력값..... 기준치를 훨씬 초과했습니다. 효력이 전혀 없어요. 연산 논리를 처음부터 다시 쓰고, 입력식도 고쳐야 할 것 같아요.
안화 : 얼마나 걸리지?
아카네 : 이런 상황이 올 것 같아서 준비를 해 두긴 했으니까...... 두 시간 정도면 충분해요.
누르 : 누르.... 누르도 도울게!
아카네와 누르가 패널 앞에 붙어앉아 토론을 시작했다. 화면 속의 거대한 괴물은 망망한 해면을 넘어 도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저 몬스터는..... 뭘 하고 싶은 걸까.
안화 : 지금으로선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어. 하지만 어제 히로가 나에게 당했으니, 제 때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
안화 : 그리고, 나는 히로의 유해화 실험실을 찾기 위해 도시 전체를 수색할 생각이야.
안화 :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상 그도 목적을 이룰 수는 없겠지.
안화 : 그러니, 이건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마지막 승부일거야. 그가 어떤 수를 썼든 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런 유해 몬스터를 조종하고 있으니까.
안화 : 어째서 저 몬스터가 히로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지는, 누르가 우리에게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누르 : 응, 누르는 확실히 들을 수 있어. 예전에는 불가능했지만...... 몬스터로 변해버린 후에 방어가 허술해진 모양이야. 누르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어.
누르 :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 "내가 여기 있어.", "사라지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를 내보내 줘." 라고.
누르 : 그녀는 자신을 가두어 두는 그 그림을 부수려 하고 있어. 스스로는 이 도시에 갇혀있고, 그 그림이 자신의 세계를 매어두고 있다고 생각해.
누르 :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 누르는 그녀가 가엾다고 생각해?
》 그녀를 막아야 해.
누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누르 : 누르는 그녀가 가엾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르는 그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어. 각오를 다지고 내린 선택이었기 때문이야.
아카네 : 저 몬스터가 바다를 거의 다 건넜어. 현재 위치는 항구 도시. 속도가 너무 빨라!
안화 : 우선, 인근 지역의 주민을 대피시키도록 하지. 그리고 그 동시에 중앙청이 각 지역의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유해의 속도를 늦추고, 인명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게 좋겠군.
안화 : 나는 어제 세웠던 계획대로 히로의 연구소를 계속 추적해서 이 사건의 배후를 조사할 생각이야. 사토미 아카네도 여기 남아 유해의 동향을 계속 감시하도록 해.
안화 : 현장 처리는 너희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겠어....... 누르, 그리고 시에나.
》 알겠어.
》 맡겨줘.
안화 : 지금 출발하자. 인근 지역의 대피부터 시작하면 될 거야.
안화 : 시에나, 누르. 너희는 우리가 이 몬스터에게 맞설 때 결정적인 무기가 될 거야. 반드시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해.
누르 : 우리에게 맡겨, 안화. 누르가 반드시 시에나를 지킬게.
누르 : 그리고..... 네트를 위해서라도..... 누르는 끝까지 싸울 거야!
거대한 유해가 도시에 나타났고, 우리에겐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다.
다행히 누르와 아카네가 곁에 있으니, 빨리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내자.
→ 눈이 녹을 때 : 시가지
: 후유카의 전투. 기억을 잃었다 하더라도, 분명 존재했던 것은 다른 방식으로 그 흔적을 남긴다.
시가지. 바다와 가까운 곳.
아직 구역 중심에는 도착하지 않았는데, 저 멀리로 한 소녀의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후유카 : .........
그 아이는 바다 위의 거대한 괴물을 마주보고, 팔을 높이 들어올리고 있었다. 금색 머리카락이 미친 듯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졌다.
옅은 푸른색의 그림자가 소녀의 뒤를 스쳐 지나간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 직후,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바다에 휘몰아쳤다.
얼음과 서리는 생명을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퍼져나갔고 넓게 펼쳐졌다. 그 순간 앞에 있던 바다가 완전히 얼어붙어 빙판으로 변했다.
얼음기둥이 유해를 덮쳐 그 거대한 몸통을 찔러 선로를 단단히 봉쇄했다.
괴물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울부짖었지만, 행동이 느려졌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후유카의 뒤에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차례로 늘어섰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바버린은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조용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눈에 담았다.
누르 : 바버린 씨....! 왜 아직 여기 계신 거에요! 여긴 위험해요, 어서 도망치세요!
바버린 : 누르 양과 지휘사님........ 저희도 본래 후유카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길 생각이었습니다만, 저 아이는 무슨 말을 해도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더군요.
바버린 :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서..... 혼자서 집을 뛰쳐나와 이곳까지 온 겁니다.
그는 해안가에서 싸우고 있는 딸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버린 : 제게 딸아이는 제 전부입니다. 저 아이를 위해서라면 제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겁니다.
바버린 :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저 아이의 생각을 존중해요. 원하는 대로 싸우도록 둘 생각입니다.
바버린 : 이게 바로, 저 아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유일한 바람이니까요.
누르 : 후유카........
누르는 후유카에게 다가가 그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앞에 선 소녀는 이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장 순진하고,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맑은 웃음이었다.
시에나 : 너, 날 기억하고 있어?
후유카 : ......응?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그 대답이 긍정인지 의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파직' 하는 맑은 소리가 들려온 순간, 후유카는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곳의 얼음이 갈라지고, 해수의 흐름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온다.
후유카 : ..........
소녀는 다시 손을 뻗어 곧 무너질 것만 같은 얼음을 유지하려 애썼다.
누르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누르 : 여긴 후유카에게 맡기고, 우린 어서 다른 곳으로 가자.
바버린은 당분간 이 곳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우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걸음 뒤에서 침묵을 지키며 계속해서 그의 딸을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바다 위, 눈꽃은 여전히 제멋대로 흩날리고 있었다.
→ 긴급 대피 : 항구 도시
: 몬스터의 파괴 범위는 계속 확대되었고, 주민들의 대피 역시 점점 긴장 속으로 치닫고 있다.
칸케츠 : 여러분, 당황하지 말고. 이쪽으로.
소녀 : 미, 미안해요. 혹시 노란색 외투를 입은 키가 큰 남자 한 명 못 보셨나요? 그를 찾을 수가 없어요!
칸케츠 : 응....? 그는 방금 저쪽 대피소로 도망쳤어.
소녀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칸케츠 : 아, 정말 슬프네. 정말 착한 아가씨인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다니.
칸케츠 : 어머?
누르 : 아.... 칸케츠 씨! 칸케츠 씨가 이곳의 대피를 돕고 있었구나.
칸케츠 : 아.... 아아.... 누르 양이구나. 오늘도 정말 사랑스러워.
칸케츠 : 나는 돕겠다고 말한 적 없어. 그런데 지나가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예정에 없던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지.
니유 : 아아―― 시민 여러분, 이쪽으로 오세요―― 이 앞은 위험지대입니다. 멀리 떨어지세요.
칸케츠 : 와아, 생기 넘치는 햇살계 미소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바다 위의 괴물을 바라보며 또 한 번 탄식을 내뱉었다.
칸케츠 : 저기 있는 저 아이..... 분명 미소녀였을텐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칸케츠 : 아직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는데. 정말 아쉽네....... 아.
찰칵, 하는 소리가 났다. 칸케츠는 카메라를 들고 유해에게 초점을 맞춰 몇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다가오는 속도가 약간 느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실질적인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칸케츠 : 공격도 소용이 없네. 나로서는 저 녀석을 여기 잠깐 묶어두는 것밖에 할 수 없지만.
칸케츠 : 누르 양도 시에나도 걱정할 필요 없어. 여기는 나 하나로 충분하니까. 만약 너희가 아주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는다면 나는 죽을만큼 아플 거야.
칸케츠와 헤어져 항구 도시를 떠났을 때, 아카네의 연락을 받았다.
아카네 : 여보세요. 저기, 잘 들려? 현재 상황을 알려줄게.
아카네 : 시가지와 항구 도시는 각각 자유섬과 경찰의 도움을 받아 해안에서 떨어진 구 시가지로 시민들을 대피시켰고, 황금우산의 시설도 이들을 수용하고 있어.
아카네 : 동방거리는 발생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편이라 대피소 역할을 수행해주고 있어. 웬시와 종한구의 인솔 하에 질서정연하게 인근 지역의 시민들이 대피하는 중이야.
아카네 : 고등학교 근처의 시민들도 모두 우류와 시비르를 따라 동방거리로 향하고 있고.
아카네 : 지금 모든 구역은 신기사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고 있어. 앞으로 몇 시간 후면 첫 번째 대피 작업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일이 끝나면 중앙청으로 돌아오도록 해. 안화가 전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까.
아카네 : 네 커피도 같이 내렸어. 지금 돌아오면 식기 전에 마실 수 있을 거야.
→ 결전을 앞두고 : 중앙청
: 히로의 연구소를 찾아냈다. 승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걸까?
안화 : 너희가 돌아왔으니, 오늘 히로의 연구소를 조사한 결과를 간단히 말해 줄게.
안화 : 확실히 히로는 사라졌고, 연구소의 지하 동굴에서는 다량의 흩어진 결정 조각만 남아 있었어.
안화 : 그 흔적으로 봤을 때, 그곳에는 이전에 유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돼. 하지만 지금은 그 유해와 히로 모두 이미 자취를 감췄지.
아카네 : 더 이상한 건, 히로는 없었지만 흑핵을 모두 남겨뒀다는 거야.
아카네 : 그러니까, 그 몬스터를 조종하는 에너지원은 흑핵이 아니야.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지금까지 세운 모든 가설과 일치하지 않아.
안화 : 그래. 히로는 흑핵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유해의 힘을 억지로 끌어올렸을거야. 하지만 이런 강화는 결코 오래갈 수 없지.
안화 : 이렇게 큰 몸체는 두뇌가 따라주지 않는 한 통제하기가 어려워. 그녀를 막으려면 여기서부터 접근하는 게 좋아.
누르 : 이왕 이렇게 된 거, 누르에게 계획이 하나 있어.
누르 : 누르는 유해 누르의 의식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으니까 알아. 안화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어.
누르 : 몸집이 커질수록 뇌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도, 몬스터가 쉽고 거친 방법으로 공격하기 때문이야.
누르 : 그래서 누르는 그녀의 의식 중 약한 부분을 건드릴 생각이야.
누르 : 우선, 누르와 레이첼 씨가 유해 누르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전 지대를 찾은 다음, 누르가 유해 누르와 공유하고 있는 의식의 황야에서 그녀를 방해할게.
누르 : 그와 동시에 시에나가 다른 신기사들과 같이 가장 가까운 고지로 가. 가서 그녀의 머리 중심을 공격해.
누르 : 그렇게 한다면, 치명타를 가하지 않아도 그녀의 전진을 방해할 수 있을 거야.
안화 : 확실히 해볼만 한 방법이군. 하지만 위험부담이 크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안화 : 두 의식의 충돌은 육체적 충돌보다 훨씬 위험해. 약간이라도 동요하게 된다면 다른 의식에게 바로 삼켜질거야. 각오는 충분히 되어 있는 거야?
》 뭐라고?!
》 너무 위험해, 누르!
누르 : 문제없어, 시에나. 누르는 이미 여러 번 만났는걸.....
시에나 : 하지만....
누르 : 중앙청의 신기사가 된 이후로, 누르는 맡은 일을 하고 있기만 하지 않았어. 꾸준히 성장했던거야.
누르 : 누르는 바보가 아니야.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알고 있어. 그러니까...... 누르를 믿어 줘.
누르가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키지는 않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누르 : 헤헤..... 고마워, 시에나.
안화 : 그걸론 부족해. 사토미. 내일 너는 나와 함께 중앙청에서 데이터 지원을 하는 게 좋겠군. 그와 동시에, 해줬으면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는데.......
아카네 : 알겠습니다. 데이터 쪽은 전부 맡겨 주세요.
안화 : 이제 각자 준비를 갖춰. 이건 중앙청의 힘으로 유해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작전이야. 내일까지 반드시 끝마쳐야 해.
아카네 : 그럼, 전 계속해서 감시실에서 유해의 행동을 관찰하고 수시로 보고할게요.
아카네 : 아무래도 또 밤샘작업을 해야할 것 같네. 하지만..... 뭔가 재미있는 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카네 : 맞아, 시에나. 단말기에 아직 확인하지 못한 정보가 남아있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 보도록 해.
아카네 : .......나 안 잊어버렸거든. 저번에 약속했잖아. 감시 시스템을 이용해서 단말기를 열고, 네 기억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아카네 : 정말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해봐서 손해 볼 일은 없겠지. 응.
아카네 : 감시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 읽지 않은 편지 : 항구 도시
: 오랫동안 기다려온 한 단락의 메세지.
단말기의 화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이어서, 간간히 전류 소리가, 또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내부로부터 들려왔다. 화면이 차츰 다시 밝아졌다.
희미한 빛을 발하는 화면에 떠오른 영상은 단 오 분에 불과했다.
》 재생시킨다.
몇 초 후,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단말기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주 기괴했다. 아주 듣기 좋았지만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고, 사람의 목소리보다는 물이 흐르는 소리, 파도가 치는 소리, 혹은 눈이 떨어지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것은 마치 비인간적인 무언가의 소리를 닮았다.
??? : 결국 이 메세지를 열었구나. 나는 정말 기뻐. 이건 우리가 세웠던 계획이 끝까지 진행되었다는 증명이고, 모든 게 순조롭다는 뜻이니까.
??? : 지금의 너는 아마 내가 누구인지 모를거야. 하지만 자기소개는 다음으로 미뤄두도록 할까. 시간이 없으니 우선 본론으로 들어가자.
??? : 네가 내 곁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단 오 분에 불과해. 나는 이 오 분 동안 네게 네 처지가 정말 엉망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어.
??? : 너는 체스말을 움직여야 하는 신분인데, 그 동시에 악의로 가득한 이질적인 것들이 모형정원 안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1
??? : 하지만 위험은 동시에 기회가 되기도 해. 그 이질적인 것은 이미 통제력을 잃고 이곳에 갇혀 있어.
??? : 만약 그녀를 걷어차 실격시킬 수 있다면 너는 네 계획을 증명할 기회를 얻게 될 거야.
??? : 네 처지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어―― 폰 하나조차 없으니까. 설령 내가 널 위한 말이 되길 원한다 하더라도 턱없이 부족하지. 체스 한 게임을 두기에는 여전히 수가 모자라. 2
??? : 하지만 사고를 전환해보자. 만약 이게 체스가 아니라면? 다른 룰을 적용시킨다면, 단 하나의 말로 보드 전체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도미노처럼.
??? : 인과는 여러 요인이 미친 영향의 산물이야. 만약 말 하나로 체스판을 뒤엎고 싶다면, 모든 기물들을 알맞은 장소에 배치해야 해.
??? : 이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네겐 이점이 있지. 너는 수없이 많은 실패를 거쳐 끊임없이 다시 도전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도미노가 세워질 때까지―― 네가 이 메세지를 열어볼 수 있는 것도 그 순간뿐이야.
??? : 내 생각에, 이제 시기가 된 것 같아.
??? : 네가 견뎌줘서 정말 기뻐. 결국 그 순간이 온 거야.
목소리가 조금씩 고조되어가는 것과 동시에, 가슴 속에 있는 무언가가 열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 :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지만, 나는 널 위해 아주 작은...... 기폭장치를 남겨뒀어.
??? : 나는 그녀와의 상의를 거쳐 네게 이 말을 하기로 결정한거야―― 오직 너만이 이 말을 들을 수 있어. 그러니 이 성문을 그 기폭장치의 촉발기로 삼도록 해.
??? : 네가 이 메세지를 전부 다 듣고 난 후에, 그건 대기 상태에 진입할 거야.
??? : 모든 게 순조롭게 끝난다면,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이건 우리만의 약속이니까.
??? : 약속이란 건 정말 아름다운 말이지.
??? :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
??? : 내가 네 마음에서 나누어 가지는 대부분의 감정은 부정적이야. 고통, 비애, 증오, 슬픔, 원망처럼.....
??? :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아니었어. 어쩌면 네가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해 주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너는 내게 다른 것들을 나눠주려고 노력했어. 기쁨, 희망, 인내, 감격, 그리움, 바람같은 것들을.....
묘한 힘이 가슴 속에 서서히 모여들었다. 무언가가 아주 작은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네가 그런 것들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거야.
??? : 그러니까 이 말을 해 주고 싶어. 신의 선택이나, 운명의 선택같은 게 아니야. 이건 너 자신의 선택이야.
??? : 너는 원래 떠날 수 있었어. 하지만 여전히 여기 남아있지. 넌 이 도시를 선택했어.
??? : 나는 믿고 있어. 그 또한 너를 선택할 거라고.
그 목소리의 주인은 온유하고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 : 나는 네가 너 자신을 위한 보답을 받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 : 그럼....... 다시 만나자, 시에나.
1일차 밤, 중앙청
중앙청이 유해 누르에 대항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나는 혼자 낯선 메세지를 읽고 있었다. 최악의 사실은 그 안에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뒤따른 실망 또한 유례없이 컸다.
똑똑똑.
누르 : 시에나. 방에 있어? 누르가 왔어.
누르 : 영차――
》 그건 다 뭐야?
》 책상 위에 둬.
누르 : 응.... 이거? 네트가 누르에게 준 거야. 오늘은 누르 부모님의 기일이거든. 그래서 네트가 누르에게 분재 두 개를 줬어........
누르 : 누르는 정말 괜찮아. 예전에는...... 이걸 떠올릴 때 정말 괴로웠지만, 요즘 누르는 훨씬 좋아졌어.
누르 : 누르는 무언가를 잃어버렸지만,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얻은 거잖아. 누르 생각에는, 어쩌면 네트가 누르에게 이런 것들을 조금씩이나마 깨닫게 해 주고 싶어했던건지도 몰라.
누르 : 방금 복도를 걸어오면서 생각했는데, 시에나의 기분이 정말 나빠 보였어....... 감시실에서 무언가를 본 거야?
시에나 : 사실...... 아무것도 못 봤어. 그래서 조금 우울해.
누르 : 아무것도 못 봤다고? 시에나 단말기에 잠겨있던 그거 말이야? 누르에게 보여 줘. 아마 누르가 분석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이쪽을 주시했고, 나는 단말기의 영상을 다시 한 번 재생시켰다.
누르 : .......그렇구나. 시에나는 이 메세지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던 거구나.
누르 : (쓰담쓰담) 이건 아주 정상적인 거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울해질거야, 시에나.
누르 : 하지만 누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니야. 그러니까..... 어떤 일들은 시에나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일이 아니기도 해.
누르 : 이 메세지를 보면, 이걸 남겼을 그 사람은 시에나의 현재 상태를 잘 이해하고 있었잖아.
누르 : 시에나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막막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이 도시를 돕고 싶어하는 것도...... 아니, 구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알고 있었어.
누르 : 이 메세지를 남긴 사람이 친구라면 정말 진심으로 너를 위하는 친구일테고, 시에나 자신이라면 단말기에 저장된 메세지야말로 시에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정보일거라고 생각해.
누르 : 특히, 제일 처음에 '계획이 끝까지 진행되었다'고 하는 부분은 이 메세지를 남긴 사람과 시에나 사이에 어떤 계획이 있었다는 걸 뜻하고 있어. 비록 기억은 나지 않겠지만, 그 계획은 지금까지도 잘 실행되고 있다는 뜻이니까 안심해도 될 거야.
누르 : 게다가 그 사람이 마지막에 한 말은...... 아주 깊고 짙은 축복의 기운이 느껴져.
누르 : 그 사람이 말하는 단 오 분간의 시간에 녹아있는 축복은 네 기억이나 신분보다 더 중요한 거야.
》 네 말은......
》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은걸까.
누르 : 누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메세지에 대해 그렇게 큰 희비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거야.
누르 : 눈앞에 펼쳐진 길은 아주 많은 갈래로 뻗어 있으니까, 한 번의 어려움은 결코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아. 내일이 있고, 새로운 단서가 있을 테니까.......
누르 : 내일이 있기 때문에, 더 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닐까.
》 고마워, 누르.
》 누르는 정말 낙관적이네.
누르 : 헤헤... 하지만, 누르는 시에나가 조금 부러워. 시에나에게는 이런 메세지를 남긴 친구가 있으니까.
누르 : 시에나, 누르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이미 예전에 누군가가 물어보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
누르 :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진상을 파헤쳐왔어. 연구원으로서나, 신기사, 더 나아가 지휘사로서도 좋아.
누르 : 그렇다면, 만약 눈앞에 보이는 진실이 원하던 것이 아닐 뿐더러 엄청나게 슬프고 괴로운 것이라면.... 시에나는 그래도 그 진실을 알고 싶다고 생각해?
》 나는 진실을 알고 싶어.
》 모르겠어.
누르 : 응..... 역시 시에나. 결단력 있는 대답이구나. 시에나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누르도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겠지.
누르 : 누르는 이미 결심했어.
누르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누르 : 시에나, 누르가 시에나에게 알려주고 싶은 비밀이 하나 있어. 내일 작전에 관한 이야기야.
》 누르는 무섭지 않아?
》 사실 굳이 모험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
누르 : 에? 아니, 아니야. 누르가 말하려는 건 그런 게 아니야. 게다가, 피한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인걸.
누르 : 만약 그 누르가 정말 나의 미래라면, 그렇다면 그녀를 완전히 물리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 하고자 하는 일은 분명 내가 모두 알고 있으니까.
누르 : .....지금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누르 : 헤헤, 왠지 누르는 동화 속 용사처럼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사명을 부여받은 기분이야.
누르 : 지금의 누르는 시에나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자라지 않았을까. 더 멋지고, 모두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걸까?
》 누르는 지금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야.
》 지금의 누르는 이미 훌륭하게 자랐어.
누르 : 누르는 네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 왜냐하면, 시에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누르는 이렇게 많은 일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었거든.
누르 : 우리는 도시를 혼란에 빠뜨린 예술품을 봤고, 흑문이 열리게 된 비밀을 알아냈고, 중앙청에서 유해를 막기 위해 애쓰고 있어........
누르 : 누르에게 있어서, 모든 경험은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두 인생 속 가장 소중한 보물이야.
누르 : 바로 그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누르는 지금의 누르가 된 거니까. 누르는 용기를 내서 유해 누르를 마주볼거야.
누르 : 그래서, 누르는 어떻게든 이 세계의 내일을 이어나가기로 혼자 결정했어.
누르 : 여기에는 네트, 아카네 언니, 레이첼 씨, 그리고 시에나와 신나는 일들이 정말 많아.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 머무를 수만은 없어.
누르 : 아무것도 모르는 채, 좁은 새장 속에 갇혀 있는 건 정말 슬픈 일이잖아.
누르 : 물론 그리울거야....... 영원히 행복한 시간에 머물 수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하지만, 더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분명 지금의 선택을 내리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 누르는 또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걸 말하기 시작했네.
》 왜 혼자 결정했다고 말하는 거야?
누르 : 헤헤.... 비밀이야.
누르는 새끼손가락을 살짝 세웠다.
누르 : 약속은 힘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누르랑 약속을 하자. 이 싸움이 끝나면, 누르가 꼭 알려줄게.
누르 : 그 메세지, 정말 재미있었어. 누르도 그 도미노 중 하나일까?
누르 : 내일이 기다려지네.
▷ 1일차 종료, 엔딩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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