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작별 : 예술관
: 마침내 진짜 기억이 되살아났고, 두 사람의 그림자는 설해의 소멸과 함께 점점 사라져갔다. 이걸로..... 전부 끝인가....
비안틴 : 그렇다면, 남은 건 이제........
비안틴은 더없이 그리운 눈으로 눈앞에 놓인 그림을 바라보았다. 색채는 천천히 호흡하고 있다. 무서워보이지만, 의외로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비안틴 : 같이 볼래, 시에나? 무서워하지 마. 지금은 이렇게 바라봐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그 그림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림 속에 담긴 광경은 매우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익숙했다.
고층 빌딩과 군중들이 전부 모래와 자갈로 변해간다. 3
누군가가 바닥에 쓰러진 채, 흑문으로 향하는 유해들에게 짓밟히고 있다. 그 행렬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만 같았다. 4
시에나 : .......이건 대체 뭐야?
시에나 : 어째서........ 그 의식에 나왔던 장면이――
비안틴 : 똑같아. 왜냐하면..... 그건 네가 확실하게 겪었던..... 진짜 기억이니까.
비안틴 : 그건 전부 진짜 있었던 일이야......
비안틴은 천천히 후유카의 곁으로 걸어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비안틴 : 이 모든 게..... 과거에, 그리고 현재 시에나에게 일어난 일이야.
비안틴 : 물론 윤회가 얼어붙는다면 내일은 영원히 밝아오지 않아.
비안틴 : 하지만 시에나가 그것을 위해 쏟아부었던 모든 노력도 헛수고가 될 거야. 그녀는 영원히 아픈 기억 속에 머무르게 되겠지.
비안틴 : 나는 너도 그런 걸 원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도 그걸 위해서니까.
후유카는 아무 말 없이 작게 떨고 있었다.
그러더니, 느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유카 : 알겠어.
후유카 : 나, 잊어버려도 괜찮아.
잊는다고? 뭘 잊는다는 거야?
후유카 : 정말 아쉽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게 가장 좋은 것 같아.
후유카 : 나는 지금까지 줄곧 잊어버리는 게 무서웠어. 그렇지만........
그녀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눈송이가 내려앉는 것처럼 희미하기 그지없다.
후유카 : 잊을 수 있어.
그녀는 한쪽 손을 캔버스를 향해 뻗었다. 색채가 그녀를 감싸안듯 뻗은 손을 타고 흘러갔다.
소녀의 다짐과 고백을 따라 주위는 한숨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후유카 : 나는 내 개인적인 감정 없이 오로지 이 도시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힘을 사용하고 싶다고는 말할 수 없어.
후유카 :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야. 그래. 그녀의 소원이 곧 나의 소원이야.
후유카 : 내 안에 살고 있는 신기 씨.....
후유카 : 내 기억을, 내 몸을, 내 존재를 원한다면 전부 가져가도록 해.
후유카 : 나는 내 이름과 내 인생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전부 잊고 싶어.
후유카 :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어.
후유카 : 시에나가 나를 기억해준다면, 그걸로 괜찮아.
후유카 : 그저 한 순간이라도 좋아.
겨울용 모자가 벗겨졌다. 그녀의 몸의 이변을 가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녀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수많은 눈송이가 그녀의 손에 모여들었다.
그 짧은 순간, 예술관 내부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순백색의 폭풍 속에서, 후유카의 모습은 점점 작아져 흐릿하게 보였다.
비안틴 : 시에나, 여기서 움직이지 마. 이 다음은 내게 맡겨.
시에나 : 뭘 하려는 거야――!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빨리 설명해......!
비안틴 : 불안해하지 마. 나는 그저.... 작은 약속을 지키려는 것 뿐이니까.
비안틴 : 후유카는 자기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눈을 다스릴 수 있는 신기 자체가 되는 것을 선택했어...... 저 아이는 이미 자신이 맡은 역할을 끝냈지.
비안틴 : 남은 건 이제 내 역할이야. 이 눈을 멈춰야 해.
비안틴은 내 손을 떼어내고, 실내에 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한 걸음씩 나아가 후유카에게 다가갔다.
고작 몇 걸음인 짧은 길을, 그는 아주 힘들게 나아갔다.
그리고 어렵게, 이제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린 후유카 앞에 섰다.
소녀는 그를 향해 소리 없이 입을 열었다.
후유카 : 나는...... 이제...... 잊혀지는.... 걸까?
비안틴 : 이 시간 속에 기억될거야. 내가 너에게 약속할게.
그는 그렇게 말하며, 후유카의 심장에 단검을 깊이 찔러넣었다.
눈보라가 갑자기 난폭하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휩쓸려 그의 몸도 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눈보라 속에 펼쳐진, 수없이 많은 칠흑색의 인과들이 희미하게 비쳤다. 마치 일그러진 실타래처럼, 그 거대한 존재를 갈라놓거나, 나누거나, 쪼개고, 다시 구분한다.
부서진 조각이 눈에 섞이고, 이미 쌓인 눈 위를 다시 덮었다. 몸이 벌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뜨거운 눈물로는 녹일 수 없는 서리.
희생으로 유일한 길이 열리는 얼음층.
그리고 빙판 아래, 줄곧 가려져 있던 밀려오는 어둠.
미친 듯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예술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갈가리 찢어졌다. 굳게 닫혀있던 창문도 언젠가부터 활짝 열려 눈과 함께 뒤엉켜 산산히 부서졌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귓가에 선하다.
비안틴 : 눈의 화신인 신기가 부서진다는 건, 곧 이 모형정원에서 '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해.......
비안틴 : 너는 이제...... 다음 윤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 시에나. 네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거야.
비안틴 : 하지만 미안해....... 이번에는, 아마...... 그 짧은 5분의 시간조차.... 없을 것 같네........
공간을 찢을 듯 몰아치는 눈 속에서, 비안틴의 목소리는 점점 귓가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들렸다.
비안틴 : 모형정원에..... 눈은 언제나 존재해. 그건 악의를 억제하고 숨겨서, 이 도시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어.
비안틴 : 주인을 잃은 지금도, 그건 여전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비안틴 : 하지만 얼음 위를 배회하기만 한다면.... 진짜 해결책은 영원히 찾을 수 없어.
비안틴 : 나는 지금까지.... 계속 걱정해왔어. 너는 분명, 네가 좋아하는 이 도시가.....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우짖는 눈보라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세계조차 감내하기 어려운 포효를 내뱉는 것만 같다.
비안틴 : 네가 진실을 마주보기로 결심해줘서, 나는 정말 기뻐...... 나는 널 믿고 있어.... 설령 미래에 진정한 어둠을 마주하게 될지라도, 너라면 분명 괜찮을거야.....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안틴 : 미안해, 시에나. 나는 이미 너무 오랜 시간동안 한 곳에 머물렀어........
그의 목소리도 바람에 녹아들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바람에 찢겨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비안틴 : 눈은 이제 금방 그칠거야........
비안틴 : .......이제 눈을 떠.

주신은 그녀의 화원에 앉아, 조각을 이어붙이고 있다.
새하얀 조각은 금색의 명주실에 꿰여 점차 원래의 모양을 회복해갔다.
― "정말이지,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혹사시켰구나.
이건 단순한 신체의 훼손이 아니라 그저 다시 합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존재 자체의 약화....
한 번만 더 이렇게 무모하게 굴었다간, 넌 아마 완전히 소멸하겠지."
― "그렇게까지 한 보람이 있는 거니?
이미 서리와 눈을 녹이는 인과를 짊어졌는데, 너는 또 네가 아끼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져다 줄 생각이로구나."
― "너는 그 사람이 널 남겨두고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걸 생각해본 적이 있니?
아니면 그걸 생각하는 것보다 네가 이 길 위에서 끊임없이 대가를 치르다 소멸하는 게 더 빠를까?"
명주실을 따라 나비가 가볍게 날았다.
손에 들린 파편이 점차 인간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파편은 입을 열어, 모호하고 희미한 목소리를 내었다.
― "당신이.... 사토미 아카네를 소중히 여기듯......"
"나 역시.... 그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될 거라고 믿어요......."
주신은 가능한지 아닌지를 말하는 대신 그저 웃었다.
시들어가는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며, 두 번째 기적을 일으켰다.
봄이 오면 눈은 녹고, 땅 밑에 숨겨져 있던 칠흑같은 진흙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 동시에,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겠지.
― "애석하게도, 그 봄은 너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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